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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그 백업

[로그 백업] 청휘(晴暉)

by 매생이 전복죽 2024. 6. 15.

2017년 7월 9일에 마지막으로 편집

 

 
 아이가 태어난 곳은 한밤중에도 싸구려 불빛이 태양처럼 밝게 빛나는 곳이었다. 홍등가에서 아이를 낳은 어미는 군말 없이 제 딸을 키웠다. 뒤늦게 임신 사실을 알고 난 후에 낳기로 한 것도 본인이었다. 그녀는 계획 없이 사는 사람이었지만 자신이 택한 결정엔 후회하지 않는 사람이었으니. 아이의 아버지는 당연히 알지 못했다. 아이가 자라서 평생 만날 일도 없었으니 친부가 대통령이라 할지라도 중요치 않았다. 정말 중요한 것은 어느 날 그 어미가 아이의 운명을 비틀어 놓았다는 점이다.
 아이의 이름은 기쁠 희(喜)에 구름 운(雲)을 써서 희운. 그럴듯하게 들리는 이름은 제 어미가 주변 유흥업소 간판의 글자를 한 자씩 떼어 조합한 것이었다. 아이는 홍등가에서 여섯 살이 될 때까지 살았다. 어려서일까, 아이는 많은 것을 빠르게 흡수했다. 희운이 그곳에서 배운 삶의 방식은 그리 복잡하지 않았다. 발톱을 드러내지 말 것. 풍경에 녹아들 것. 그게 전부였다. 아이는 제 일을 잘해냈다. 밤에는 방에 숨어있었지만, 아이는 문틈 사이로 사람들의 여러 면모를 보게 되었다. 가령 방금 전까지만 해도 친절하던 남자가 갑자기 폭력을 휘두르는 것이라던가. 깨어지는 유리 파편을 보면서 아이는 사람이 꼭 일관적이진 않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 어렴풋이 짐작했을지도 모른다. 다정함과 따뜻함, 그리고 잔혹함과 냉정함이라는 감정이 함께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을. 같은 유리 파편을 보면서 아이의 어미는 다른 생각을 했다. 어차피 제 딸이 여기서 자란다면 저와 같은 삶을 살기밖에 더하겠나. 여자는 감히, 그럴 바엔 차라리 여기가 아닌 곳에서 다른 삶을 살게 해주자고 생각했다. 마침 저를 만났던 손님 중에 차이나타운에서 쓸 아이를 산다는 사람이 있지 않았던가. 제 딸은 분명 여기서 사는 것보다 그리로 가는 것이 더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다. 설령 무언가가 잘못되어도, 죽기밖에 더하겠는가. 그리하여 어느 가을 밤, 아이는 모르는 남자의 손에 이끌려 차이나타운에 발을 들였다.
 
 여긴 다른 세상 같아. 그날 아이가 처음으로 떠올렸던 생각이었다. 이곳에선 한밤중에 장사를 시작하지 않는다, 거리는 조용했다, 붉은 불빛도 없었다. 남자는 희운을 중년의 남성에게 데려가 그를 ‘아빠’라고 부르라고 했다. 그럼 엄마는요? 그리 묻자 젊은 남자가 웃었다. 그 사람은 이제 잊어, 널 팔았잖아. 희운은 엄마가 받은 돈 봉투를 봤었다. 그래서 더 묻지 않았다. ‘아빠’라는 사람이 내일부터 일을 하라고 했고,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버지.”
‘아버지’는 희운의 눈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돌아나가는 아이의 등 뒤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쟨 좀 독해 보이네. 쓸만한 것 같아. 아이는 그 말에 담긴 의미를 금방 알아들었다. 차이나타운에서의 생활 일주일 째. 쓸모없어진 것들은 쉽게 버려졌다. 가장 처음 본 상실은 제 옆에서 자던 아이에게 일어났다. 그 애는 툭하면 제 부모를 찾으며 울었다. 그렇게 울다 보니 제대로 돈을 모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버려졌다. 어딘가 인적이 드문 도로에 짐짝 버리듯이 내팽개쳐졌다. 사람이 한 명 줄어들었다. 아이는 그날 밤에 몰래 베개를 적셨다. 그런데 아버지도, 언니 오빠들도, 모두가 멀쩡했다. 아이는 그것이 싫었다. 그런 식으로 죽을 생각은 없어. 그때부터 희운은 속에 칼을 품었다. 다른 것들은 아무리 빛나 보여도 모두 우선순위가 밀렸다. 살아서, 살아서, 살 것이다. 나는 살 거야. 작은 입이 속삭였다.
 시간이 흘러 아이는 점점 커갔다. 희운은 계산에 능한 모습을 보였는데, 딱히 수학적 능력이 뛰어나서는 아니었다. 그것보단 손해 보는 것을 끔찍이도 싫어했기 때문이리라. 제 몫 하나 제대로 챙길 수 없으면 살아가기 어려웠으니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다정한 성격 탓에 친구도 많이 생겼다. 지금은 이름을 잊어버린 한 여자아이와는 단짝 친구가 되었다. 밥을 먹을 때도, 잠을 잘 때도, 가족사진을 찍던 날도 그들은 함께였다. 둘은 어른이 되었을 때를 꿈꾸며 여기서 나가면 같이 살자는 대화를 나누었던가. 그러나 그 약속을 무참하게 깨버린 것은 희운이었다. 실수가 아니었다. 그보다 더 고의적일 수는 없었다.
 
“살아남는 두 명에게 내 자리를 물려줄 생각이다. 열심히 물어 뜯어보거라.”
30명 가량의 아이들을 모아놓고 아버지가 꺼낸 말이었다. 모두가 주춤했고, 공기가 멈췄다. 워낙 옛날이라 그런지 그때의 일은 단편적인 장면들로만 남아있었다. 누군가는 쫓고, 누군가는 쫓겼다. 제 친구와 함께 붙어있으면 아버지가 말한 두 명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천성이 부드러웠고, 희운은 그녀와 함께하면 발목이 잡힐 것을 알았다. 그래서 첫날, 제게 말을 하고 있던 소녀의 등을 칼로 찔렀다. 망설임 없는 동작이었다. 그녀가 죽고 나서도 일말의 미련은 보이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살아남는 것 아닌가. 저는 그녀를 아꼈지만, 그건 그거고 현실은 현실이었다. 잘 훈련된 사냥견처럼 죽어가는 시체를 뒤로하고 희운은 다음 상대를 찾으러 떠났다. 제 손으로 몇 명을 죽였던가. 그 많은 인원은 점차 줄어들었고, 혈향이 텅 빈 거리를 가득 채우는 것만 같았다.
“희야.”
“학오빠.”
송학을 만나 간략한 인사를 끝내기도 전에 소녀는 쇠파이프를 휘둘렀다. 치열한 몸싸움이 오갔고, 그가 들고 있던 칼이 제 왼쪽 손등을 깊게 긋고 지나갔다. 피는 멈추지 않았고, 조금만 엇나갔더라면 평생 그쪽 손을 사용하지 못했으리란 것을 알았다. 수지에 맞게 제 몸에 큰 상처를 낸 대가를 받아내야 했다. 그리 생각하며 배에 칼을 찌르려는데 멀리서 커다란 목소리가 들렸다.
“그만해라!”
아버지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너희들이 개들의 왕이다. 그 말에 희운은 말없이 송학을 향했던 팔을 내렸다. 모든 것이 끝났다. 대신 소녀는 일어서서 그에게로 걸어갔다. 아버지, 그러면 당신에게서라도 받아내야겠어요. 이 모든 것에 나를 밀어 넣은 대가를, 다른 아이들을 죽이게 한 책임을, 내 목숨을 걸게 한 값을. 또박또박 걸어가는 걸음 끝에 소녀는 제 아버지에게 칼을 꽂았다. 송학도 같은 짓을 했던가, 그건 확실하지 않았다. 소녀의 시선은 그가 바닥으로 추락하여 숨이 끊어질 때까지 중년의 남성에게서 한 번도 떨어지지 않았기에. 소녀는 직감적으로 그것이 제가 맞이할 최후라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것은 희미한 인상이자, 먼 미래의 이야기였다. 그가 죽은 것을 확인한 열일곱의 소녀는 중얼거렸다. 나 정말로 살아남았네. 이제 내가 엄마야.
“돌아가자, 학오빠.”
 
 돌아간 그들에게는 갈색 봉투에 담긴 문서 두 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입양증명서와 진짜 주민등록증. 종이 위로는 ‘태희운(太喜雲)’이라는 글자가 또렷하게 적혀있었다. 희운은 주민등록증을 빤히 바라보았다. 기쁠 희(喜)자는 저와 별로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한자 사전을 집어들은 아이는 한참 후에 짐승 이름 희(㺣)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법적인 효력은 없더라도 앞으로 제 이름은 이것이었다. 인간 거죽을 뒤집어쓴다고 짐승이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었으니. 이제 무얼 할거냐는 질문에 아이는 주인이 나간 중국집을 갖겠다고 했다.
“괜찮은 장사나 좀 하려고요. 참, 언니 오빠들은 오지 마세요. 손가락 아깝잖아요.”
 
 유독 화창한 날, 희운이 텅 빈 중국집의 내부를 쓸었다. 도박판을 관리하려면 일손이 많이 필요할 것이다. 곧 새로운 아이들을 맞이해야 했다. 새로운 시작을 하기 전에 이곳의 이름은 무엇이 좋을까. 때마침 화려한 창틀 사이로 햇빛이 비쳤다. 청휘(晴暉). 청휘루. 입속으로 그 말을 몇 번이고 굴려본 아이는 작게 미소 지었다. 정말 좋은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