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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2016~)

[수현아라] 눈

by 매생이 전복죽 2015. 10.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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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고했어."

아라가 죽었다.
수현은 어딘가 나른해보였다. 제 첫사랑이 죽은 것에 대한 슬픔따윈 전혀 보이지 않았다. 여느 때와 같이 입가엔 느슨한 미소를 걸고 여유로운 목소리로 수행원들에게 몇 가지 지시사항을 덧붙였다. 왜냐하면 아라를, 수현만의 환웅을 죽인 것은 다름아닌 수현 본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직접 제 손을 쓴 것은 아니었다. 고의로 교통사고를 내어 아라의 다리를 못쓰게 만들었을 때도, 새끼 호랑이를 납치하려 했을때도, 이번 일도 수현은 장기말을 움직이듯 명령을 내렸다. 왕이 제 손을 더럽힐 순 없는 법이니.

아라의 마지막을 직접보진 않았지만 머릿속에 생생하게 그려졌다. 더 이상 쓸 수 없는 환웅의 힘을 쓰려고 하다가 절망했을 것이다. 분명 저주하듯 제 이름을 큰소리로 부르짖었겠지. 어쩌면 끝까지 곰 일족에게 저주를 퍼부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원망과 증오의 눈물이 담긴 눈동자로 살아남을 방법을 강구하고 있었을지도. 애석하게도 가장 생존율이 높아보이는, 허리를 굽히고 목숨을 구걸하는 행위 따윈 아라의 선택지에 존재 하지 않았겠지만.

수현은 미동도 없는 아라를 내려다 보았다. 무릎을 굽혀 금빛 머리카락을 쓰다듬자 식어가는 온기가 손에 아른거렸다. 아라야. 수현이 작게 중얼거렸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기분이 이상했다. 당장이라도 고개를 들어 냉랭한 눈빛으로 저를 쏘아볼것 같은데 아라의 맥은 멈춘지 오래였다.

"아라야."

아라의 눈은 항상 보석같았다. 아라를 처음 본 날, 수현은 그 눈빛에 사로잡혔다. 반짝반짝 빛나는 모양이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어느날 문득 일렁인 호기심. 행복 속에서 빛나는 네 눈은 절망 속에서도 빛날 수 있을까? 다리를 잃은 날, 모든것을 잃고 밑바닥으로 가라앉은 아라의 눈에선, 그럼에도 아름다운 빛이 났다. 나는 더 이상 그 빛을 볼 수 없는걸까, 아라야?

바닥을 향한 아라의 턱을 가볍게 쥐고 옆으로 돌린 수현은 아라의 닫힌 눈꺼풀을 보며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했다.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난 수현은 제 심복 중 한 명을 불렀다.

"부탁할게 있는데..."


수현이 타고 있던 차의 문이 열린 것은 그로부터 몇 십분 후였다. 그녀의 심복이 건넨 것은 적당한 크기의 지퍼백이었다. 수현은 고맙다며 그것을 받았다. 입구를 열고 손을 집어넣어 엄지와 검지로 내용물 중 하나를 꺼낸 수현은 작게 탄식을 내뱉었다. 보석은 언제나와 같이 아름답게 빛났다. 그것엔 식어가는 아라의 체온이 남아있었다. 아직 가시지 않은 비릿한 피 냄새가 코를 찔렀다.

"여전히 아름답네."

찬찬히 음미하듯 그것을 이리저리 돌려보던 수현은 천천히 '자신만의 보석'에 입을 맞췄다. 이대로 입에 넣고 굴려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세상에 단 두 개 밖에 없는 것을 그렇게 망가뜨리고 싶진 않았다.

아라의 눈에는 더 이상 저에 대한 경멸이나 증오가 들어있지 않았다. 수현은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 동시에 이질감이 뱃속을 가득 채웠다. 마음 속 한 구석에서 노란 햇볕을 받던 수현의 고향집이자 아라가 살던 한옥의 서까래가 와르르 무너져 내린다. 집터에 처박혀 폭삭 무너진 집 사이로 흉측하게 튀어나온 서까래들은 썩은 짐승의 몸을 뚫고 나온 갈비뼈를 연상시켰다. 분명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이며 무엇이 기쁜 것이고 무엇이 슬픈 것인지를 구분짓는, 그 마지막 경계가 부숴진 것 일테지.
수현은 밋밋한 미소를 지으며 몇번이고 아라의 각막을 햇빛에 비춰보았다.

"그래도 네게 있었을 때가 가장 보석같았는데."

그렇지, 아라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