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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2016~)

[조각글/창작]002. 너를 만나기로 한 날

by 매생이 전복죽 2016. 6. 19.
*영화 '냉정과 열정사이'를 보고 나서 쓴 글입니다. 물론 영화와 크게 관계 없습니다.
*글 연습 용입니다. 문체 시도 겸 손 푸는 용.

 

 

 

 



"나 저기 꼭 가보고 싶어."

얇은 손가락이 벽에 걸린 사진을 가리켰다. 카페의 벽엔 주인이 이곳저곳에서 모아온 엽서들이 잔뜩 붙어있었다. 그중에서도 그녀가 고른 것은 에펠탑이 찍혀있는 흑백 엽서였다. 

"에펠탑 가본 적 없어?"

프랑스로 유학까지 왔는데, 한 번도? 놀란 눈으로 덧붙이자 여자가 웃음을 터뜨린다.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남자도 그녀의 반응에 머쓱했는지 따라 웃었다. 아니, 바보야. 여기 오자마자 제일 먼저 간 곳인걸. 여전히 멍청한 표정을 한 그가 재밌다는 듯 여자가 감추었던 말을 몸소 입 밖에 내어 주었다.

"너랑 가보고 싶다고."

이 얼마나 우아한 분위기를 깨버렸는가. 저가 방금 매끄러운 마카롱의 꼬끄를 손가락으로 파삭 눌러버렸단 것을 자각한 남자는 수습에 나섰다.

"그럼 가면 되잖아. 지금 기차 타고 갈래?"

아, 이번에도 답이 아니었나 보다. 여자가 툴툴대듯 고개를 저으며 장난스레 그의 팔을 꼬집었다. 그녀의 장단에 맞추어 아프다는 시늉을 한 남자는 양손을 들었다. 좀 봐줘, 내가 너처럼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은 아니잖아. 단번에 납득 했다는 표정을 한 여자의 모습에 항의하고 싶었지만 그럴 근거가 없어 조용히 기다리기로 했다. 

"그렇게 바로 가버리면 기다리는 설렘이 없잖아."

나지막이 말한 그녀의 말엔 낭만이 들어있었다. 도대체 기다리는 것에 어떤 설렘이 있는진 모르겠지만, 분명 그는 모르는 그녀만의 감성이 있는 것이겠지. 그럼 언제 가고 싶냐고 물으려던 찰나, 여자가 먼저 말을 앞질렀다. 

"우리 앞으로도 사랑하고 있을까?"

"무슨 말이 그래."

남자가 커피잔을 들어올려 한 모금을 들이켰다. 그게 무슨 말이야. 넌 내 전부잖아. 내뱉지 못한 말도 함께 삼키며. 아메리카노의 씁쓸함이 혀를 마비시켰다. 그녀는 그의 우주였고 저는 그 안의 작은 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니 그녀가 자신 곁에 없는 미래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겁먹은 눈동자를 숨긴 남자는 초조하게 여자의 손끝만 쳐다봤다.

"5년 뒤에 같이 가자."

여자가 손을 뻗어 냅킨 두 장을 집어 무언가를 적었다. 남자에게 건넨 냅킨엔 5년 뒤 지금의 날짜와 p.m.1:00, 에펠탑 꼭대기에서, 라는 말이 검은색 볼펜으로 적혀있었다. 제 것에도 똑같은 것을 적은 여자는 그것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바빠도 잊으면 안 돼, 라는 말을 당부하며. 남자는 그것을 반듯하게 두 번 접어 셔츠 앞주머니에 넣었다. 어쩐지 여자에게서 나는 아이리스 향이 배어있는 것만 같았다.


요란하게 알람이 울렸다. 아직 새벽이라 밖은 어둑어둑했다. 좁은 침대에서 일어난 남자는 천천히 샤워를 하고 옷을 차려입었다. 아침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곤 기차역으로 향했다.
기차에서 깜빡 잠이 들어 눈을 떴을 땐 이미 목적지에 도착해 있었다. 종이에 적어온 대로 길을 따라 걸어갔다. 막 문을 연 꽃집이 보이자, 남자는 잠시 멈춰 섰다. 다시 걸어가기 시작한 그의 손에는 흰색 아이리스 다발이 들려있었다. 

에펠탑의 앞에 선 남자는 잠시 그것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아직 눈이 시린 색. 오후 한시까지는 시간이 한참 남았는데도 눈이 절로 뜨여서 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평일이라서 그런지 줄은 그리 길지 않았지만, 개장 시간인 아홉 시 반까지는 한 시간이나 남았다. 남자는 하는 수 없이 줄을 서서 기다렸다. 탁탁거리는 텅 빈 구두 소리를 내며. 너는 올까? 

별이 제 우주에서 떨어져 나간 건 이년 전의 일이었다. 결별을 말한 것은 제 쪽이었는데도 찰랑거리는 후회 속에 녹아내렸다. 다른 사람을 안 만나본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녀가 지워지지 않았다. 잊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감히 별이 우주를 잊겠는가. 궤도에서 이탈했지만, 아직도 우주를 맴돌고 있는 제 모습을 문득 발견해버렸다. 아직도, 아직도.

개장시간이 되었는지 사람들이 우르르 걸어가기 시작했다. 남자도 따라 발걸음을 옮겨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천천히 꼭대기 층의 전망대에 도착한 남자는 전망을 휙 둘러보고 벤치에 앉았다. 시간은 답답하고도 느리게 흘렀다.
드문드문 남자가 들고 있는 꽃다발을 본 사람 몇이 그에게 말을 걸어왔다. 여자친구 기다리나 봐요? 그가 불어를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느릿하게 몸동작까지 섞어가며. 남자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런 거 아니에요. 관광객인 줄 알았던 동양인 남자가 유창하게 불어를 하는 것을 보고 조금 놀란 얼굴을 한 그들은 그럼 누굴 기다리냐며 되물었다.

"Mon univers(내 우주)."

 대부분은 그를 이상하게 쳐다봤지만, 종종 시인 같네요, 라는 소리도 들려왔다. 들었어? 딱딱한 나한테 시인이래. 그게 누구 때문일까. 속으로 네게 말을 건넸지만, 당연하게도 대답은 없었다. 약속 시각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세상 모든 구두 소리가 전부 네 것 같았다. 또각또각하는 소리마다 고개를 번쩍 들었고 이내 실망으로 다시 고개를 숙이게 되었다. 그렇게 오후 한 시가 지나갔다. 남자는 에펠탑이 관광객이 많은 곳이라 예매를 하지 않으면 긴 줄을 서야 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직 그 줄 사이에 끼어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가만히 기다렸다.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해가 저물고 밤이 찾아왔다. 그럼에도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던 건, 미련. 그리고 일말의 기대감. 계속 네 목소리를 들은 것만 같았는데 뒤를 돌아보면 아니었다. 씁쓸함의 연속이었다.
"마지막입니다!"
관리자의 목소리가 그를 현실로 돌려보냈다. 시간이 흘러, 그래, 폐장시간까지 남자는 떠나가지 못한 것이다. 남자는 서서히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내려다보자 흰 아이리스 다발을 들고 있었다는 것이 생각이 났다. 남자는 힐끔, 알 수 없는 웃음을 짓더니 의자에 꽃다발을 내려놓고 승강기를 향했다. 너는 여전히 오지 않았다. 안녕, 그리고 안녕. 남자는 그렇게 이별을 고했다. 기쁜 소식이 올 거라는 일말의 기대마저 무참히 꺾였고 네 물음에 대한 답은, 우리는 여전히 사랑하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남은 것은 우주를 떠나지 못한, 오래전에 죽어버려 잔광을 내는 별뿐. 안녕, 안녕히. 사랑했습니다.
승강기의 문이 드르륵 열렸고, 남자가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