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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미션, 연교

[D타입] 녹아버린 아이스크림은 돌아오지 않는다.

by 매생이 전복죽 2024. 7. 3.

 

 

녹아버린 아이스크림은 돌아오지 않는다. - 신후유

 

 

 

 

사랑을 이루어주는 맛, 코이소후.”

 

빙글빙글 돌린 하얀 소프트콘 위로 색색의 구슬 모양 과자가 흩뿌려져 있었다. 그 옆에 적혀 있는 글씨를 읽은 안도 신지는 현재 하라주쿠에서 유행한다는 아이스크림의 광고가 실린 잡지의 기사를 읽어내렸다.

 

코이소후에서는 다양한 맛의 소프트 아이스크림에 카가와현의 혼례식 답례품이자 전통 과자인 오이리를 얹어서 판매합니다. 여러분의 사랑도 어쩌고... 그래서, 후유카쨩?”

 

신지가 비장한 표정을 한 키사라기 후유카에게로 시선을 옮기자 겁먹은 햄스터처럼 바들바들 떨면서도 후유카는 꿋꿋하게 광고가 실린 잡지를 다시 한번 들이밀었다.

 

, 이번에 비번인 날, 저랑 같...이 좀 가주세요!”

 

의외의 말에 신지가 눈을 깜빡였다.

 

이번 휴일? 그러지 뭐.”

 

후유카의 비장한 결심이 무색하게도 신지는 흔쾌히 제안을 수락했다. 같이 가달라는 이유는 후유카가 직접 말하지 않아도 뻔했다. 분명 식당에서 직원에게 주문하는 것조차 어려워하는 그 소심한 성격 탓이리라. 그 탓에 후유카는 늘 편의점 음식이나 사내식당에서 식사를 해결하곤 했다. 신지가 산더미 같이 쌓여있던 후유카의 편의점 도시락을 회상하는 동안 후유카는 잠시 다른 생각에 빠졌다.

그러니까 키사라기 후유카는.

여태까지.

단 한 번도.

휴일에 남자와 단둘이 사적인 시간을 보낸 적이 없었다.

 

, 그럼, 이건... 데이트?!’

 

왜 그래, 후유카?”

 

데이트? 데이트인 건가요?!’

 

저기, 후유카쨩...?”

 

어떡하죠, 어떡하죠..!’

 

먼저 제안한 쪽은 자신인데도 후유카의 눈이 빙글빙글 돌았다. 겨울바람과 폭설의 악마의 힘이 합쳐져 냉기가 쌩쌩 도는데도 어쩐지 키사라기 후유카는 후덥지근하다는 생각을 했다.

 

왜 더 추워진 것 같지...”

 

신지만 영문도 모른 채 얼굴이 붉어진 후유카 앞에서 더 세지는 것 같은 냉기에 정장을 여몄다.

 

 

 

*

 

 

 

안도씨! , 저 왔어요!”

 

약속한 휴일을 맞아 만나기로 한 장소에 먼저 도착해있던 신지는 고개를 돌렸다. 평소에도 서로의 모습은 잔뜩 봐왔지만 둘은 언제나 공안복 차림이었으니까 후유카의 사복 차림은 그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렇게 제게로 다가오는 후유카와 눈이 마주친 신지는 그대로 고개를 갸웃한 채 멀뚱멀뚱 서 있었다.

 

후유카쨩은... 의외로 대담한 편이네.”

 

? ? 뭐가요?”

 

패션이...?”

 

프릴 가득한 치마와 하트 무늬가 박힌 스웨터. 토끼 귀가 달린 코트에 레이스 스타킹과 리본 장식 가득한 머리까지. 귀엽긴 하지만 누가 봐도 튀는 게 하라주쿠 패션 그 자체였다. 당장 거리에도 그런 패션을 한 사람들은 종종 있었지만 소심한 후유카가 평소에도 이런 옷을 입었다는 것은 다른 이야기였다.

 

, 그치만... 하라주쿠에 오면... , 다 이렇게 입는 거, 아니에요...?”

 

누가 그래?”

 

하라주쿠 큐트 걸즈 에브리데이 잡지요...”

 

잡지 이름부터 신빙성이 떨어지지 않아?”

 

.”

 

신지가 웃음을 터뜨리자 후유카는 사고가 정지한 듯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후유카의 고향에는 이런 번화가가 없었고, 도쿄로 상경하고 나서는 사적으로 외출한 적이 별로 없었다. 그나마 틈틈이 챙겨보는 잡지만 보고 도쿄 사람들은 이렇게 사나보다, 했더니 그것도 아니란다. 주위를 둘러보자 아니나 다를까, 하라주쿠 패션을 입고 있는 소녀들도 종종 지나갔지만, 일반적인 옷차림을 한 사람들이 더 많이 지나다녔다. 상황을 이해한 후유카는 민망했는지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 그러는 안도씨도 신기하네요...”

 

뭐가?”

 

후유카와 반대로 신지는 평범하면서 적당히 멋스러운 캐쥬얼 차림이었다. 긴 검정 패딩에 검은 목티, 헐렁한 회색 셔츠와 블랙진. 이렇게 입은 건 역시 데, , 데이트라서일까, 같은 생각을 하며 후유카가 그를 살펴보았다.

 

공안복이 아니라는 점이?”

 

그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두 사람이 시시콜콜한 잡담을 하며 길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다행히 잡지에 나온 가게는 그리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알록달록한 구슬 장식이 되어있는 간판과 몰려있는 사람들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으니까. 가게 안에 들어서자 귀여운 옷차림의 소녀들이 가득했고 손에는 사진에서 봤던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들고 있었다.

 

, 귀여워...”

 

실물을 본 후유카가 저도 모르게 감탄을 내뱉었다. 사이사이로 꺄르르 떠드는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고백할 건데 효과가 있을까, 다음엔 남자친구랑 와서 먹었으면 좋겠다, 첫사랑인데 잘 됐으면 좋겠다 같은 이야기들이었다. 신지가 핑크빛으로 가득한 주위를 둘러보다가 후유카의 쪽으로 몸을 굽혔다.

 

근데, 사랑이니 뭐니, 이게 다 무슨 소리야?”

 

, , 여기 아이스크림이... , 사랑을 부른다고 해요. 애인이 생기게 해준다거나... 짝사랑을 이루어 준다거나...”

 

날 두고 잘 되고 싶은 사람이라도 있는 거야, 후유카짱?”

 

신지가 장난스레 우는 소리를 내자 후유카가 그 자리에서 펄쩍 튀어 올랐다.

 

, , , 무슨 농담을 하는 거, 예요!”

 

자아, 주문하자, 주문.”

 

신지가 키득거리며 후유카의 등을 떠밀자 후유카는 얼떨결에 그를 따라 카운터로 향했다. 하지만 막상 그 옆에 서려니 부담스러워, 미묘하게 신지의 뒤에 선 후유카는 그의 옷깃을 단단히 붙들고 제 몸의 반쪽만 빼꼼히 내밀었다.

 

어서 오세요, 사랑을 이뤄주는 맛, 코이소후입니다. 주문하시겠어요?”

 

뭘로 주문할 거야?”

 

신지가 후유카의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후유카가 메뉴를 바라보았다. 바닐라, 초코, 딸기, 검은 깨... 수많은 메뉴에 머리가 핑글핑글 도는 것도 같았다.

 

, 그럼.... 딸기... 아니, 바닐라... ...”

 

섞을 수도 있는 것 같은데, 그건 어때?”

 

, 좋아요. 그걸로 할래요...”

 

딸기 바닐라 믹스 하나요.”

 

오이리 과자 토핑 추가하실까요?”

 

과자 추가할 거야?”

 

이걸 위해서 여길 오자고 했다. 후유카는 주먹을 꾹 쥐고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 많이 추가!”

 

많이 추가요.”

 

후유카를 바라보는 신지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돌았다. 이렇게까지 진심일 일인가 싶기도 했고, 그 점이 귀엽기도 했고.

 

컵으로 하실까요, 콘으로 하실까요?”

 

, 뭐래요?”

 

컵으로 할 건지, 콘으로 할 건지.”

 

어떤 게 좋지...”

 

후유카가 일생일대의 고민에 빠진 듯이 끙끙댔다. 보기엔 콘이 예쁘지만 먹기엔 컵이 편하니까. 발을 동동 구르던 후유카가 도와달라는 듯이 신지를 올려다보았다.

 

, 어쩌죠?”

 

... 콘이 더 낫지 않아? 유명한 아이스크림점은 콘 과자도 맛있다던데.”

 

, 그런가요? 그럼 콘으로요...”

 

콘이요.”

 

직원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주문을 받았다. 그의 눈에선 생기란 생기가 전부 빠져나간 것 같았으나 서비스직이란 어쩔 수 없었다. 속으로 커플의 악마가 나타난다면 바로 여기로 와달라고 고래고래 외치고 있었으나 손님 앞에서 티를 낼 수는 없었다. 그냥 빨리 퇴근이나 시켜달라는 만인의 소원을 빌며 직원은 공허한 눈으로 아이스크림을 만들었다.

 

주문하신 딸기 바닐라 믹스 콘 하나 나왔습니다. 다음 손님!”

 

아이스크림을 받아든 신지는 후유카에게 건네며 소곤거렸다.

 

저 직원, 조금 이상한 표정이지 않았어...?”

 

, ? 전 잘...”

 

그런가...”

 

카운터에서 나오자 가게는 여전히 사람으로 북적였고, 두 사람이 마땅히 앉을만한 공간은 없었다. 무엇보다 꺄악거리는 십대 소녀들 틈이나 자신들만의 러브러브 세계에 빠진 커플들 사이에는 앉으라고 자리를 깔아줘도 사양하고 싶었다.

 

그으.... 여긴 너무...”

 

밖으로 나갈까?”

 

신지의 말은 구세주 같았다. 후유카는 잽싸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게에서 조금 걸어 나오자 공원 벤치가 나왔다. 한적하고 조용해 둘은 그곳에 앉기로 했다. 신기한 듯 먹기 전에 이리저리 아이스크림을 감상하던 후유카는 문득 신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안도씨는 왜 주문 아, 안 했어요?”

 

이 겨울에 밖에서 아이스크림을 먹었다가 감기에 걸리는 건 사양이야. 난 오히려 이 날씨에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어하는 후유카쨩이 더 신기한데?”

 

신지가 피식 웃었다. 그러자 후유카는 고개를 푹 숙였다.

 

, 그런가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후유카는 아이스크림을 베어 물었다. 농후한 바닐라의 맛과 상큼한 딸기의 맛이 한데서 어우러졌다. 구슬 모양의 과자는 뻥튀기 같은 식감인데도 솜사탕 맛이 났다. 무엇보다 혀에 닿자마자 눈송이처럼 사르르 녹아버렸다. 과연 사랑이 이루어지는 맛이구나 싶을 정도로 달콤하고 귀여운 맛이었다. 눈을 빛내며 우물거리는 후유카의 모습을 한동안 바라보던 신지가 입을 열었다.

 

후유카쨩은 왜 이걸 먹고 싶어 한 거야?”

 

그으...”

 

아이스크림을 먹던 후유카의 얼굴이 잠시 회상에 젖었다. 어릴 때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이건 그의 많고 많은 기억 중에 좋았던 기억이었다.

 

예전에... 훗카이도에 살 때, 좋아하던 잡지에 이 가게가... 실려서요. , 한 번쯤은 와보고 싶었어요.”

 

후유카가 멋쩍게 웃다가 덧붙였다.

 

, 정말로 사랑을 이루어 주는지도... 궁금...했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시선에는 수줍음이 감돌았다.

 

에이, 그럴 리가.”

 

그러나 곧바로 신지가 손을 휘저었다. 그와 함께 후유카의 기대 섞인 수줍음도 와장창 산산조각이 났다.

 

당연히 그런 건 다 상술이지.”

 

... , 안도씨는 낭만이라고는 조금도 몰라요...! 바보! 바보바보!”

 

안도 신지는 잠깐 이것이 후유카가 최선을 다한 욕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말로 했다간 더 매도당할 것 같아서 입을 다물기를 택했다.

 

, 그래도... 같이 와 줬으니까... 그건... , 고마워요.”

 

우물쭈물하던 후유카가 바닥을 보고 배시시 웃더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저도 모르게 신지를 향해 활짝 웃어 보였다. 꼭 추운 겨울날에 개화한 이름 모를 꽃처럼 만개한 웃음. 문득 안도 신지는 이 기억은 잊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키사라기 후유카가 제게 이렇게 웃어준 것은 처음이었고, ...

 

아이스크림 맛은 어때?”

 

, 맛있어요. 호화로운 딸기우유 같은 맛이 나고... 과자는 달콤한데 바로 녹아버려요! , 드셔보실래요?”

 

괜찮아. 후유카쨩이 맛있다고 하니 나는 여름에 와서 먹어볼게.”

 

여름이면... 아직 머네요...”

 

그땐 더우니까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어지겠지. 그때도 또 같이 가자.”

 

...!”

 

 

 

 

*

 

 

 

몇 년이 흘렀을까. 안도 신지는 하라주쿠 공원 벤치에 홀로 앉아있었다. 남자의 손에는 분홍색과 하얀색이 섞인 아이스크림에 알록달록한 구슬 모양의 과자가 올려진 귀여운 소프트콘이 들려있었다.

 

... 이건 또 언제 샀지...”

 

어디서, 언제 사 왔더라. 그런 기억들은 그에게 없었다. 왜 그 많고 많은 곳 중에서 하필 이곳, 하라주쿠로 왔는지도. 여름 햇빛은 머리가 아플 정도로 강렬했다. 무엇이든 시들게 만들어버릴 태양은 아이스크림도 녹여버렸다. 신지의 손 위로 달콤하고 끈적한 액체와 녹아버린 과자가 범벅이 되어 뚝뚝 떨어질 무렵, 그는 무언가 중요한 것을 잊어버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분명 무언가가 있었던 것도 같은데. 그는 멍하니 아이스크림을 들여다보았다. 마치 그렇게 하면 뭐라도 떠오를 것처럼. 이제 바닥은 질척이는 분홍빛 액체로 흥건했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녹아버린 아이스크림은 돌아오지 않는다. 당연하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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