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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타입] 우리 집 포포 (장편)

by 매생이 전복죽 2025. 5. 15.

 

우리 집 포포(장편) 약 3.4만자

 

 

 

프롤로그. 어느 날 개가 되었습니다.

 

복실복실.

하얗고 폭신한 앞발이 눈앞에서 살랑거렸다.

A는 이를 만져보려 손을 뻗었으나 이상하게도 앞발은 멀어져만 갔다.

가지 마!’

!”

? 이 느닷없는 개소리는 무엇인가. A가 고개를 돌려봐도 강아지는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다...’

끼잉...”

이상하게도 A가 입을 열 때마다 제 목소리는 안 들리고 어디서 강아지 소리만 들려왔다. 아직 잠이 덜 깼나 싶어 눈을 비비려는데 손 대신 보송한 앞발이 A의 눈꺼풀에 챱 붙었다. 설마. 불길한 예감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묘하게 가까운 곳에서 헥헥대는 소리가 들려왔고 어디선가 꼬순내가 났다. 저도 모르게 코를 킁킁이고 있노라면 등 뒤에서 꼬리가 살랑살랑 흔들렸다. 그러니까, 꼬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A가 허겁지겁 앞에 보이는 유리창으로 다가갔다. 이상했다. 가까이 갈수록 점점 더 크기를 키워오는 것은 사람의 실루엣이 아닌 까만 콩 세 개가 박혀 있는 커다란 솜뭉치였다. A가 우뚝 멈추자 솜뭉치도 움직이지 않았다. 자세히 들여다보자 솜뭉치는 하얀 비숑이었다.

이거 꿈이지...?’

A는 망연자실하게 유리창에 비춘 강아지를 바라봤다. 강아지도 A를 빤히 바라봤다. 솜뭉치를 오랫동안 들여다보면 그 솜뭉치 또한 우리를 들여다본다...가 아니라.

그러니까, 지금, A, 강아지가 되어버렸다.

미친 거 아니야?!’

아우우웅?!”

자신의 목소리 대신 개 짖는 소리가 들리자 A는 그 자리에서 기절하고 싶었다. 무슨 판타지 세상 속에 떨어진 것도 아니고, 21세기 과학 문명의 시대에 갑자기 사람이 개로 변했다는 건 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지. A가 머리를 유리창에 꿍 박았다. 그러자 둔탁한 소리와 함께 머리가 아파 왔다. 깨어나지 않는다. 정말 이게 꿈이 아니라고? 극심한 혼란 속에서 정신이 하나도 없던 A는 강아지의 목에 목걸이가 걸려있던 것도 보지 못했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 강아지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나긋나긋하고 다정한 소리.

안녕, 넌 이름이 뭐야?”

소녀가 쪼그려 앉아 저와 눈을 맞췄다. 이게 누구냐면, A의 전 과외순이, B였다. A는 이 혼돈 속에서 갑자기 나타난 아는 얼굴에 감격해 그의 이름을 애절하게 불렀다.

‘B...!’

!”

B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A, 아니, 강아지를 쳐다봤다.

...”

B가 무언가 알아챈 듯이 말하자 A는 귀를 쫑긋하며 간절한 눈빛으로 B를 올려다 봤다.

그래, 나야! 제발 알아봐줘!’

저도 모르게 A의 꼬리가 흔들렸다.

“...이름이 포포구나?”

깜빡. A가 그대로 굳어버렸다. BA의 목에 걸려있는 이름표를 보고 있었다.

아니야, A라고!’

답답해서 외치는 목소리는 다시금 개 짖는 소리로 변환되어 흘러나왔다. B는 그것이 긍정의 표시라고 생각했는지 손뼉을 치며 포포구나! 포포야! 하고 기뻐하고만 있었다. 이대로는 안 된다. 어떻게 하면 인간으로 돌아갈 수 있는 걸까. AB를 바라보며 그렇게 생각함과 동시에 마치 본능처럼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흘러들어왔다.

모든 마법은 공주님의 키스로 풀린다.

...그것도 딥키스로.

...? 딥키스요? 갑자기요? 믿을 수 없는 전개에 A가 소리를 지르자 다시금 개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건 진짜로 개소리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무것도 모르는 B는 해맑게 웃으며 A, 포포를 쓰다듬었다.

포포야, 잘 부탁해!”

 

 

1. 과외쌤 꼬시는 법

 

선생님, 저 이제부터 언니라고 불러도 돼요?”

봄바람이 불어오는 날, 캠퍼스의 구석진 곳에 있는 카페는 한적했다. 스피커에서는 차분한 음악이 흘러나왔고 고소한 커피 냄새가 퍼졌다. AB는 딸기 주스가 놓인 테이블에서 서로를 마주 보고 앉아있었다. A는 얼굴형이 갸름했지만, 어딘가 동글동글한 인상이 있었다. 아마도 그의 눈과 코끝 때문이리라. 그 탓인지 강아지 같은 느낌도 들었다. 반면 B는 완전히 말랑동글 그 자체였다. 얼굴형도, 볼도, 두툼한 입술과 A 앞에서 동그랗게 뜬 눈마저도. 뺨과 코에 있는 작은 점은 안 그래도 뽀얀 얼굴을 귀엽게 보이게 했다. B의 물음에 A는 가볍게 대답했다.

, 그럴래?”

AB의 전 과외 선생님이라곤 하나 어차피 한 살 차이였고, 이제는 같은 대학에 다니게 된 선후배 사이였다. 게다가 B가 워낙 저를 잘 따랐으니 A도 마다할 게 없었다.

그러엄~ A...”

이름을 뚝뚝 끊어 말한 B는 있는 힘껏 치명적인 척을 하며 동그란 눈을 내리깔고 입술을 쏙 내밀었다.

어어...”

A... 당황스러웠다. 이게 뭐지? 얘가 뭘 잘못 먹었나 싶어 A는 눈을 깜빡거리다가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캠퍼스 마저 구경시켜줄게, 가자.”

네에~!”

 

날이 저물 무렵, A는 정말로 B한테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지 진지하게 고민하기에 이르렀다. 저 멀리서 천천히 오는 차를 보고 B가 저보다 큰 A의 허리를 낑낑대며 잡아당긴다던가, A를 뚫어지게 쳐다볼 땐 언제고 막상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아닌 척 시치미를 떼고, 아무리 봐도 평평한 땅에서 어색하게 넘어지기도 했다.

“B 너 설마...”

A가 운을 떼자 B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올려다 봤다.

배고파서 그래?”

“...!”

AB의 말랑한 뺨을 콕콕 누르면서 빨리 말하지 그랬냐고 핀잔했다. B는 사실 별생각이 없었으나 A과 함께 식사할 자리를 마다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A의 생각과는 다르게 B의 당황스러운 행동들은 계속되었다. 그다음 만남에도, 또 그다음 만남에도.

얘가 왜 이러지..?”

AB가 자신에게 호감이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B가 과외순이였던 시절부터. 여자가 여자를 좋아하는 거야 뭐, 별 대순가. A에게 그런 의도로 접근한 이들은 한둘이 아니었다. 다만 B를 그런 식으로 생각하기엔 뭐랄까, 너무... 착했다. 착한 게 나쁜 건 아니지만 연애 상대를 고를 때 걔 착해라는 말은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말 아닌가. 다른 말로 하자면 재미 없단 소리였다. B는 매번 토끼같이 동그랗게 뜬 눈으로 저를 쳐다보며 얌전하기만 했으니까. 말랑말랑한 뺨은 귀여웠지만. 아무튼, 그런 이유만으로 연애를 할 수는 없는 거다. 그런데 저와 같은 대학에 들어온 이후부터 갑자기 이상해진 B의 행동들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뜬금없고 엉뚱했다. 저런 애가 아니었는데. 처음 맞는 대학 생활이 낯설어서 그런가? A는 이런저런 생각을 했지만, 마땅히 결론이 나진 않았다.

 

한편 집으로 돌아온 B는 책상 위에 두꺼운 플래너를 펼쳤다. 표지에는 B의 손글씨로 과외쌤 꼬시는 법이라고 적힌 라벨 스티커가 붙어있었다. 펜을 집어 든 B유혹이라고 적힌 항목을 펼쳤다.

-섹시하게 이름 부르기

-차를 피해서 끌어당기기(두근!)

-가끔 안 본 척하기(튕기기)

-덜렁거리는 척해서 귀엽게 보이기

항목들을 쭉 내려다본 B는 한숨을 쉬며 자신이 시도했던 일들에 선을 그으며 지워나갔다. 분명 자료조사는 완벽했다. 드라마, 영화, 인터넷 검색. 자신이 아는 지식과 모르는 지식을 전부! 끌어모아 자그마치 장장 5년간의 연애 계획을 세워놨다. 분명 꼬시는 스킬을 전부 사용했을 즈음엔 A가 제게 홀라당 반해 있을 것이고 그때 고백을 하면 알콩달콩 예쁘게 사귀는 결말이 등장해야 했다. 그런데 왜?

왜 안 반하는데?”

항상 A를 볼 때면 동그랗게 뜨고 있던 눈은 어느새 힘이 빠져 졸린듯한 모습이 되었다. 사실은 이게 편했다. 그뿐만일까. A의 앞에서는 귀엽게 보이고 싶으니까 있는 힘껏 내숭을 부려 얌전한 척을 해왔다. 한숨을 푹 내쉰 B는 플래너의 목차들을 쓸어내렸다. 손가락이 이민결혼에서 멈췄다.

언제 결혼까지 하지...”

입이 댓발 튀어나온 B가 중얼거리다가 머리를 흔들었다.

아냐, 아직 시간 있어.”

유혹하는 방법 리스트는 아직 한참 남아있었다. 내일은 기필코 성공할 테다. 주먹을 불끈 쥔 B는 그렇게 다짐하며 A를 꼬시고 말겠다고 다짐했다.

분명 그랬는데...

 

죄송한데 혹시 A 언니 못 봤어요?”

“A? A? 그러게, 계속 결석이네... 무슨 일 있나?”

B의 입이 떡 벌어졌다. A과 며칠째 연락이 안 되어서 A의 과를 찾아갔더니 수업에도 안 나왔단다. 집에도 찾아갔는데 인기척도 안 났고. 이리저리 수소문해봐도 최근에 A를 봤다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B의 눈동자가 빠르게 흔들렸다.

하루아침에 짝녀가 실종됐다.

실종!

그렇다고 멈출 B가 아니었다. 반드시 A를 찾아내고 말 것이다. 그야, 운명의 상대인걸.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날도 어김없이 A를 찾아 터덜터덜 헤매던 B는 집 근처에서 하얀 솜뭉치를 발견했다.

! 강아지다!”

그렇게 B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강아지가 되어버린 A를 주워버렸다.

 

안내 말씀드립니다. 하얀색 비숑 강아지 포포를 잃어버리신 분을 찾고 있습니다...”

몇 시간째 기다렸지만 포포의 주인은 당연하게도 나오지 않았다. 아파트 단지 안내방송은 물론, 동네 어플이며 강아지 카페와 SNS에도 글을 올렸지만, B에게 온 연락은 한 건도 없었다.

아이고, 학생 어쩌지? 누가 이사 가면서 버린 거 아닐까?”

포포를 발견한 아파트 단지의 관리사무소에 앉아있던 B는 포포를 쳐다봤다. 포포는 B의 무릎 위에 얌전히 앉아있었다. 동시에 포포는 어딘가 멍하니 넋이 나간 것처럼 보였다. 강아지가 이렇게 공허한 눈도 하나 싶을 정도로. B는 잠시 고민하더니 포포의 겨드랑이 밑으로 손을 넣고 번쩍 들어 올렸다.

포포야, 우리 집에 갈까?”

포포가 마구 꼬리를 흔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똑똑한 개는 고개도 끄덕일 줄 아나보다. 고양이만 키워봐서 개에 낯선 B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무튼, A도 찾아야 하는데 언제까지 여기서 죽치고 앉아있을 수는 없었다. 결국 연락이 오면 알려달라고 자신의 전화번호를 남긴 B는 포포와 함께 집으로 향했다. 그렇게도 찾아 헤매던 짝녀가 자신의 품 안에 얌전히 안겨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2. 강아지의 인권을 보장하라(1)

 

깜빡, 깜빡. B의 품에서 잠시 졸았는지, A가 눈을 뜨자 익숙한 B의 집이었다. B가 바닥에 내려주자 A는 유유히 집안을 탐색했다. 저기 저 의자는 자신이 자주 앉던 의자였고, 바닥 한쪽에 둘둘 말려있는 담요는 가끔 무릎에 덮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 옆엔 B가 벗어둔 양말도 있었다. 그것들에 다가가서 킁킁 냄새를 맡던 A는 돌연 우뚝 멈춰섰다.

양말. 냄새를. 맡았다?

이게 대체 무슨 추태란 말인가. 개도 아니고!

잠깐... ?

A는 급하게 신발을 벗고 있는 B에게로 뛰어갔다. B가 집 안으로 들어오자 분명 항상 저보다 조금 밑에 있던 머리는 까마득한 저 위에 있었다. 그뿐만일까. 걸을 때마다 들리는 챱챱대는 발소리와 자연스럽게 네발로 걷는 걸음걸이는 분명히 강아지의 그것이었다.

진짜로 꿈이 아니라고...?’

A가 말도 안 된다고 저 구석에서 중얼거리자 꿍얼대는 강아지의 소리만이 들려왔다. 걱정스럽게 그 모습을 보던 B는 폰으로 이것저것을 검색해보더니 잠시만 기다리라는 말과 함께 다시 밖으로 나갔다.

‘B, 기다려!’

!”

하지만 이미 현관문은 닫힌 뒤였다. B가 급하게 동네 마트와 동물병원을 돌며 강아지 용품을 쓸어 담을 동안 A는 집안을 빙빙 돌았다. 안 그러려고 해도 집 구석구석의 냄새를 맡자 마음이 조금은 평안해졌다. 그러는 동안 아까 떠오른 인간으로 돌아가는 방법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공주님의 키스. 그것도 딥키스를 해야 인간이 될 수 있다니. 아니, 되겠냐고요! 솔직히 믿기진 않았다. 하지만 그래, 누군 개가 되었는데 이것보다 믿기 어려운 사실이 또 어디 있겠나. 지금 이 상황에서 제게 주어진 단서는 이것 하나뿐이었다. 그러니 밑져야 본전 아니겠는가. 하지만 B의 입술까지 닿으려면 물리적인 거리만 해도 까마득했다. 어찌저찌 B가 저를 안아 든 후를 노린다고 해도 그랬다. 키스라면 어렵지 않을 테다. 무작정 얼굴로 돌진해 입술 박치기를 하면 되니까. 하지만 딥키스라면 말이 달랐다. 혀를... 입속에 깊숙이 넣어서...

평소의 A가라도 전 과외 학생과 다짜고짜 딥키스를 하는 것이 망설여질 판인데, 설상가상으로 자신은 지금 개였다. 세상에 누가 개랑 딥키스를 하겠냐고! 그냥 돌아가지 말란 소리 아니야? 망연자실해진 A가 바닥에 털썩 엎드리고 있다 보니 현관문이 열리고 B가 들어왔다.

미안하지만 네 입술을 뺏어가야겠어.’

A가 눈을 꾹 감고 맹렬하게 달려들었으나... 아무리 애를 써봐도 B의 무릎 위에 앞발이 닿는 것이 고작이었다.

포포야, 오래 기다렸어?”

B가 포포를 한 번 쓰다듬고 품에 안고 있던 물건들을 식탁에 내려놓았다. A는 의자 위로 올라가 B가 정리하는 물건들을 살펴봤다. 강아지 사료와 그릇, 배변 패드와 목줄, 강아지용 장난감과 간식들, 그 외의 잡다한 물건들까지.

포포, 일단 밥 먹을까?”

.

생각해보니 배가 고팠다. A의 꼬리가 맹렬하게 흔들리며 시선이 B에게 고정되었다. B는 그릇을 씻고 그 안에 사료를 부었다. BA의 앞에 그릇을 놔두자 A가 그 앞으로 돌진하다가 우뚝 멈췄다.

잠깐만, 이거 개 사료잖아.’

그랬다. 자신은 사람인데 개 사료를 먹으라니.

이건 아니야. 이거... 이거 아니라고!’

우와앙... 앙앙!”

포포를 빤히 바라보던 B가 고개를 갸웃했다. 포포가 저를 보고 뭐라고 짖어대는데 도통 그 이유를 몰랐으니까. B가 밥그릇을 살피기 위해 몸을 숙이자 A의 눈에 가까워진 B의 입술이 들어왔다.

지금이 기회다!’

번쩍 뒷다리로 선 A가 수그린 B의 어깨에 양발을 올리고 주둥이를 들이밀었다. 그렇게 입이 맞닿았다. 하지만 딥키스라고 하기엔 아직 멀었다. A가 혀를 내밀고 B의 입술을 핥았다. 느릿하게 아랫입술을 핥고 살짝 깨물면 입이 벌어져야 하는데... 그런데...

핥핥핥핥.

입술이 닿은 이후부터 A의 혀는 본능적으로 맹렬히 움직였다. 정신없이 B의 입술 위를 핥아댔다. 그러자 B가 꺄르르 웃다가 A를 밀어냈다.

밀어냈어...? 나를...?’

충격을 받은 A가 털썩 주저앉았다. B는 손등으로 제 입술을 문질러 닦더니 포포의 엉덩이를 두드렸다. 아니, 그걸 왜 두드려? 근데 기분은 또 좋았다. 푸근하고...

정신차려, A!’

뽀뽀해준 거야, 포포야?”

특이하게 앉네. 개도 비련의 여주인공 같은 자세를 하나? 그렇게 중얼거린 B는 포포의 앞에 물그릇도 놔줬다. A는 밥그릇 앞에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키려고 노력했으나 솔솔 풍겨오는 개밥의 향이 분하게도 먹음직스러웠다. 딱 하나만 먹어볼까... 맛만 보는 거다. 인간도 가끔 키우는 반려견의 사료나 간식을 먹어본다고 하지 않던가. 이 정도는 그러니까 충분히 인간다운 행동인 것이다. 그렇게 자신을 설득시킨 A는 사료를 딱 한 알 입에 넣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포포, 많이 배고팠구나.”

밥그릇은 텅 비어있었다. 분하게도 맛있어서 정신없이 코 박고 먹어치워 버렸다. 그래, 사람이 살다 보면 개밥도 먹어보고 그런 거지. 여기서 상황이 얼마나 더 나빠질 수 있겠는가. A는 그렇게 생각하며 자신을 위안했다.

그럼 다 먹었으니까 쉬하고 목욕하자!”

자신이 안일했다. 상황은 언제나 더 나빠질 수 있었다. 화장실로 끌려가며 A는 비명을 질렀다.

내 인권! 내 인권은?!’

슬프게도 B에게는 목욕하기 싫다고 낑낑대는 강아지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3. 강아지의 인권을 보장하라(2)

 

목욕은 전쟁이었다. 진이 쫙 빠진 B와 수건 말이를 당한 A가 바닥에 퍼질러졌다. 다 큰 성인이 남의 손에 강제로 빡빡 씻겨지는 경험은 악몽 같았다. 거기다 개의 본능인지, 샤워기의 소리와 물줄기가 닿는 것이 너무 싫었다. 몇 번의 탈출 시도는 전부 수포로 끝났고, B는 드라이기로 제 털까지 말려주었다. 인간의 무언가를 포기한 A는 수건 속에서 꼼지락거리는 것 말곤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심지어 고생했다고 B가 제 입에 들이민 강아지 간식도 먹어치운 뒤였다.

A는 빤히 B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저렇게 가까이에 있는데 닿을 수 없다니. 목욕을 하면서 A는 몇 번이고 B의 입술로 돌진했지만, 키스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A가 낑낑대며 B와 키스할 작전을 다시 세우는 동안 B는 예의 두꺼운 플래너를 꺼내와 바닥에 펼치고는 찰팍 엎드렸다. 펜을 들은 그는 목차에 새로 만든 실종란을 펼치고 펜을 들었다. B의 행동에 호기심이 생긴 A가 수건 뒤로 삐져나온 뒷다리를 열심히 밀어 B의 옆에 누워서 플래너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 안에 오늘의 날짜를 표시한 걸 본 A는 경악에 찰 수밖에 없었다. 자신은 그냥 평소와 같이 잠들었다가 강아지가 되어 눈을 떴을 뿐인데 하루가 아닌 일주일이 넘게 지나있었다. 플래너의 안에는 빼곡하게 A의 행적과 실종의 가설들이 B의 손글씨로 적혀 있었다.

날 계속 찾은 거야?’

A의 마음이 찡해졌다. 누군가는 계속해서 자신을 잊지 않고 있어 줬다니. 비록 자신은 그의 옆에 꼭 붙어있는 상태지만. 빨리 알아차려 줬으면 좋겠지만. 입술이라도 순순히 내어줬으면 하지만.

본가로 돌아갔나? 아냐, 그러면 연락했을 텐데.”

B가 중얼거리며 플래너 위에 엑스 표를 쳤다.

“...설마,”

그 옆에 여전히 수건으로 말려있는 A는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누가 실종자가 개가 되어 나타났을 거란 생각을 하겠는가. B가 무슨 생각을 떠올렸건 자신에겐 가망이 없었다.

외계인한테 납치당했나?”

...가망이... 있나? A가 의외의 희망을 발견하는 동안 B는 자신의 추측을 진지하게 써 내려갔다. 동그란 UFO를 타고 온 초록색 외계인이 생체실험을 하려고 빔을 촥 쏴서 둥실둥실 타고 올라간 A 언니. 이 옆에 진지하게 별표까지 쳐두었다.

내일은 UFO를 본 사람 있나 찾아봐야지.”

아니, 정말로 가망이 있어 보였다. A는 급하게 B가 든 펜으로 손을 뻗었다. B의 손에서 펜이 떨어지자 A는 그걸 쥐고 종이 위에 글씨를 쓰려고 했다. ‘A가야.’라고 적으면 인간으로 돌아가는 것도 순식간이다. 기회가 온 것이다. 그런데,

또르르.

펜이 저만치 굴러갔다. A의 입이 허망하게 벌어졌다. 아 맞다. 개는 펜을 쥘 수가 없지.

... 안돼...’

급하게 뛰어간 A는 입에 펜을 물었다. 손으로 안 된다면 입으로라도 쓰고 말겠다는 집념이 가득했다. 그 순간 B가 가뿐히 A의 입에서 펜을 뺏어갔다.

포포야, 그거 먹는 거 아니야. 지지!”

A가 몇 차례 펜을 향해 손을 뻗었지만 전부 허사였다.

아니, 한 번만. 나 펜 한 번만 달라고!’

아무리 애절하게 외쳐도 A의 목소리는 전부 낑낑대는 강아지 소리가 되어버렸다.

, B!!! 언니 미치는 꼴 보고 싶어?!’

물론 부정적인 의미로. A는 사랑하는 사람을 손에 넣지 못해 눈이 뒤집히는 드라마 속 캐릭터들의 심정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그깟 펜이 뭔데 나를 미치게 해. 아니야, 방금 한 말은 진심이 아니었어. 제발 한 번만 돌아와 줘, 내가 잘할게!

?”

그때 펜을 저만치 치워두던 B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이거 얼룩인 줄 알았는데, 점인가 보네.”

몸을 숙인 B가 다시금 맹렬히 제 입술로 돌진하는 포포의 얼굴을 밀어두며 강아지의 목 부근을 만져보았다.

“A 언니도 여기 점 있는데...”

A의 꼬리가 마구 흔들리고 다리를 주체하지 못한 채 이리저리 깡총거렸다.

포포 너 이제 보니까 A 언니 닮았네.”

그래! 나야! 나라고!’

! 멍멍!”

햐앟고, 크고, 보송보송하고... 귀엽고...”

혹시 네가 A 언니야? 이 한마디만 나와준다면 된다. 거의 다 왔다. A가 온 마음을 담아서 간절하게 B를 쳐다봤다. B가 스르르 입을 열었다.

나도 목에 점 있는데.”

‘?’

그래서 나랑 A 언니는 운명이거든? 포포 너도 나랑 운명인가 봐!”

대체 그게... 무슨 소리야...?’

아우우우...”

A가 한쪽 앞발로 이마를 짚었다. 목에 점이 있어서 운명이면 세상 모든 목에 점 있는 사람끼리 사랑과 전쟁 찍게? B가 코앞에서 정답을 놓쳤다. 이 기분은 마치... 스크린 도어가 닫힙니다. 지각인데 스르르 눈앞에서 닫히는 지하철 문. 그 안에 타서 해맑게 손을 흔드는 B. 그리고 닫힌 문 앞에서 털썩 무릎을 꿇는 자신.

망했다...’

말 그대로 환장할 노릇이었다. A는 머리를 마구 헤집고 싶었다. 복복복... 그렇게 생각함과 동시에 무언가가 머리를 긁어주고 있었다. 조금은 안정도 되고 시원해서 그 감각에 편안히 몸을 맡기던 A는 그대로 굳더니 머리를 천천히 돌렸다. 뒷발이었다. 그러니까 자신의 뒷발로 머리를 긁고 있던 것이다.

아 제발...’

A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여기서 더 추락할 인권은 없어 보였다. 이미 갈 데까지 가버렸다. 그러나 그로부터 며칠 후, A는 자신이 틀렸음을 알게 되었다. 아니었다. 더 추락할 곳이 있었다.

그리고,

“B야 혹시 여소 안 받을래?”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리까지.

 

 

4. 누가 산책이라고 하였느냐

 

그 언니 말고 다른 사람도 좀 만나봐.”

전화는 스피커폰으로 연결되어있었다. 친구와 시시콜콜한 대화를 하면서 과외쌤 꼬시는 법플래너를 뒤적이던 B, 옆에서 둥그렇게 몸을 말아서 졸고 있던 A도 그 말에 얼어붙었다.

“...알잖아, A 언니랑 결혼까지 생각하고 있는 거.”

“...결혼은 너 혼자 하니?”

워낙 충격적인 소리를 들은 후라 다행인지 불행인지, A의 귀에 B의 말은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다른 사람을 만난다고?’

A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아무리 그래도 애인 있는 상대에게 딥키스를 하는 건 양심상 좀 그런데. 아니, 그보다도 저를 좋아하는 거 아니었나? 충격과 심란함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A가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너도 이제는 짝사랑 말고 주고받는 연애도 해봐야지, B.”

“...”

전날 마라탕을 먹어서인지 한층 더 통통해진 B의 입술이 대답을 뱉을 것처럼 달싹거렸다. 그러나 A가 한 발 더 빨랐다. 두 다리로 벌떡 선 포포는 건물이 떠나가라 맹렬하게 짖기 시작했다.

! 멍멍! 멍멍멍!”

A가 딱히 무슨 말을 전하려고 한 건 아니었다. 일단 짖고 보자는 생각으로 본능에 몸을 맡겼을 뿐. 지금은 인간으로서의 자존심보다 눈앞의 B를 막는 일이 급했으니까.

, , 미안. 나 강아지가 짖어서, 다음에 연락할게!”

뒤늦게 정신을 차린 B가 허겁지겁 전화를 끊었다. 그러자 A도 짖기를 멈추고 멀쩡하게 네발로 섰다. 방에 정적이 흘렀다.

내가 방금...’

무슨 생각을 한 거지...?’

두 사람의 머릿속에 같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 포포야, 배고팠어?”

......!”

방금 전의 상황을 수습하려는 듯이 두 사람은 열심히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누가 봤다면 사람이랑 개가 동시에 뚝딱거리는 기묘한 광경이라고 생각했겠지만.

그러고 보니 포포야,”

B가 새로 부어준 사료를 챱챱거리며 먹던 A의 귀가 쫑긋거렸다. 한껏 복슬대는 털에 가려 보이지는 않았지만.

우리 산책갈까?”

 

아직은 추운 초봄이었지만 하늘은 새파랬고 포포와 쏙 닮은 하얀 뭉게구름들이 떠 있었다. AB에게 주워진 이후로 처음 나가보는 바깥이기도 했다. 여기에 사람이 개로 변할 정도의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났는데도 바깥세상은 바뀐 것 하나 없이 여전했다. 그 모습에 A는 안도감과 동시에 씁쓸함을 느꼈다. 꼭 자신이 빠져도 세상은 잘만 돌아가는 것 같았으니까. 그래도 아직 키스의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기회를 노려 성공하고 말겠다고 다짐하며 AB와 함께 첫걸음을 뗐다.

비록 세상은 바뀐 것이 없었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A의 시각은 크게 바뀌었다. 가치관이나 태도의 이야기가 아니라 폭삭 낮아진 시선과 후각에 의존하게 되는 버릇이 그랬다. 잔뜩 신이 나서 이곳저곳을 킁킁대며 탐색하는 포포를 보는 B의 입술이 흐뭇한 곡선을 그렸다. 눈대중으로 맞춰 산 하늘색 하네스가 딱 맞아서 다행이었다. 평화로운 낮이었다. 비록 불편함은 있었지만, A는 개가 되고 나서 처음으로 마음의 평화를 만끽했다. 이후 자신에게 닥칠 인권 나락의 현장은 상상도 못 한 채.

B의 집 근처에 있는 공원에 도착했을 무렵, A의 시선은 반대편에서 걸어오는 털 덩어리에 꽂혔다. 갈색의 자그맣고 앙증맞은 포메라니안이 제 주인과 산책을 나온 모양이었다.

어머, 귀여워라. 혹시 저희 해피랑 인사시켜도 괜찮을까요?”

포메의 하네스 줄을 잡고 있던 중년의 아주머니가 웃으며 B에게 말을 걸어왔다.

그래도 돼요? 얘는 포포예요. 제가 강아지는 잘 모르는데...”

B가 포포와 해피를 번갈아 보며 동그랗게 뜬 눈을 깜빡였다.

데려온 지 얼마 안 됐나 봐요? 이럴 때는...”

아주머니의 말에 B가 귀를 기울이는 동안 A는 눈앞의 해피를 바라봤다. 꼬리가 이리저리 씰룩이자 해피가 가까이 다가오며 제 꼬리를 흔들었다.

귀여워!’

원래도 개를 좋아하던 A가었다. 자신이 개로 변하는 불상사만 없었다면 지금 이 순간을 만끽했을 텐데, 같은 생각을 하며 그는 해피에게 몸을 가까이 붙였다. 해피는 원래 사교성이 좋은 강아지인지 반갑다는 신호를 계속 보내고 있었다. A 역시 이에 화답하며 코를 킁킁거렸다.

어머, 포포가 해피한테 인사하네요.”

이게 인사예요?”

, 강아지끼리는 이렇게...”

A의 눈앞에서 먼지털이 같은 해피의 꼬리가 정신없이 팔랑거렸다. 냄새 맡는 데 방해된다고 생각하던 A가 돌연 우뚝 멈춰섰다.

“...엉덩이 냄새를 맡아서 서로를 알아가요.”

A의 눈앞에는 털로 빵빵한 해피의 엉덩이가 있었다.

내가 지금... 강아지 궁뎅이 냄새를 맡았다고...?’

A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심지어 B는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냥 신기하게 보는 정도가 아니라, 관찰하듯이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 내 인권...’

A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와중에 아무것도 모르는 해피는 옆에서 발발거리기나 했다. 어머, 참 특이하게 앉네... 아주머니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A의 귀에 들어왔지만 어질어질한 정신에 그것까지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B 앞에서 이런 모습을 보이다니...’

솔직히, A는 쪽팔려 죽을 것 같았다. 아무리 B가 지금의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다고 해도 그랬다.

‘B... 집에 가자.’

와아웅...”

한껏 불쌍한 표정을 지은 A가 애처롭게 B를 불렀다.

왜 그래, 포포야?”

B의 다정한 목소리에 울컥해진 A가 그의 발치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집에 가고 싶어?”

A가 반색하고 폴짝 뛴 순간,

? 저기 친구들 더 온다! 포포는 친구 많아서 좋겠네~”

갑자기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 나온 사람들이 어디서 이렇게 많이 나왔는지 공원은 삽시간에

만남의 장이 되었다.

그만.’

포포야, 가서 인사해!”

‘B, 제발 그만!’

하지만 A의 마음속 외침은 B에게 닿을 리 없었다. 신나게 걸어가는 B의 뒤에서 유

진은 속으로 비명을 지르며 끌려갈 뿐이었다.

 

살면서 볼 강아지 궁뎅이는 다 봤다...’

집에 돌아와 발이 물티슈로 박박 닦인 뒤에야 A가 마룻바닥에 축 늘어졌다. 강아지 유치원 하원길이랑 겹쳤다던가. 수많은 인사를 거치고 난 후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 야속하게도 B는 제 심정 따위 알 리가 없었고.

‘B는 그동안 알던 모습이랑 많이 다른 것 같은데...’

비단 오늘만의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동안 봐온 B의 모습은 A가 알고 있던 그저 착하기만 한이미지와는 사뭇 달랐다. B는 확실히 엉뚱했고 다정했다. 오늘 산책만 해도 자신에겐 곤욕이었지만 객관적으로 생각해보면 임시 보호 중인 개를 성심성의껏 챙겼기 때문이 아닌가. 언어가 통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두 눈을 마주하며 자신을 이해하려 애쓰는 모습에는 늘 진심이 가득 담겨있었다. 다 크고 나서 이렇게 따뜻한 다정함을 가족 외의 타인에게 받아본 적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지금도 사라진 A 찾기에 열심이었다. 틈만 나면 인간 A를 생각하는 듯한 지고지순한 순애가 애틋했다. 얘가 이렇게나 진심으로 날 좋아했다니.

창가에서 흘러들어오는 햇빛이 책을 읽느라 집중하는 B의 옆모습에 닿아 반짝였다. 반들반들한 아기 같은 볼에 콕 박혀있는 작은 점, 천천히 달싹이는 긴 속눈썹, 동글동글한 얼굴에 비해 오똑 솟은 콧날, 그리고 앵두같이 도톰한 입술.

얘가 이렇게 예뻤었나...?’

A는 한동안 넋을 놓고 B를 바라보았다.

왜 그래, 포포야?”

A의 시선을 느꼈는지 B가 고개를 돌리고 눈을 맞췄다. 부드러운 눈매가 초승달처럼 접히며 해사하게 웃는다. 봄날의 햇살이 내리쬐는듯한 따스하고 사랑스러운 얼굴에 A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지금이라면...’

딱 맞는 눈높이. 가까운 거리. 아마도 로맨틱한 분위기. 지금보다 완벽한 기회는 없을 테다. 인간으로 돌아가면 B에게 뭐라고 말해야 하나 고민하면서도 AB의 입술에 제 주둥이를 들이밀었다.

 

 

5. 나를 묶고 가둔다면 사랑도 묶인 채

 

A의 입에 말캉한 B의 입술이 닿았다. 드디어, 며칠인지도 모를 나날을 지나 인간으로 돌아갈 수 있다. A는 희미하게 웃으며 환하게 밀려오는 햇빛을 마주했다.

.

아우, 포포야!”

여전히 저를 포포라고 부르는 소리에 A가 감기던 눈을 퍼뜩 떴다. 이번에도 어림없다는 듯이 A의 혀는 B의 입술 뒤로 넘어가지 못했다. 심지어는 입과 입 사이에 B의 손바닥이 끼어들었다.

내가 그렇게 좋아?”

A는 몽글몽글하던 기분에서 깨어나 강아지로 변한 자신의 처지를 다시 한번 통감했다. 만약 지금 자신이 인간의 모습이었다면 B가 이렇게 키스를 막았을 리 없을 테니까. 감정에 정신 팔릴 때가 아니었다. 빨리 인간으로 돌아가는 것이 먼저다.

아니, 들어봐 B. 내가 지금 개로 변했는데 너랑 키스해야 된다니까??’

아우우우?”

생각과는 정반대로 제 입에서 흘러나오는 앙증맞은 소리에 A는 속이 뒤집힐 것 같았다. 하지만 모로 가도 서울로만 가면 된다는 소리도 있지 않나. 지금은 애교를 부리든 뭘 하든 해서라도 딥키스를 성공시켜야 했다. 그 과정에서 자괴감도 느껴지고 진한 현타도 오겠지만. 그냥 이렇게 살면 안 되나 싶겠지만. 아무튼 짧막한 꼬리를 흔들어가며 AB의 얼굴로 다시금 돌진했다. 그리고 또 실패했다.

다섯 번째를 넘어간 시점부터 A는 세는 것을 그만두었다. 이 고통에 의미가 있는 걸까... 계속된 공격 실패에 AA대로 정신적으로 지쳤고 B는 철벽 방어를 하던 탓인지 체력적으로 지친 듯했다. 혹시라도 포포가 또 달려들까 봐 허겁지겁 자리에서 일어난 B는 수상하단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하지만 또 금방 고개를 갸웃했다.

원래 강아지는 다 이런가...?”

 

그날부터 A의 오기가 차올랐다. 이전처럼 어쩌다 한 번 최적의 기회를 노리는 것에 그치지 않기로 결심했다.

‘B... 네가 순순히 당해줬으면 나도 이렇게까지 안 했어.’

어딘가 이글거리는 포포의 눈길을 느꼈는지 책상에 앉아 노트북을 두드리고 있던 B가 흠칫했다.

포포야, 공놀이할까?”

애써 웃으며 B가 작은 공을 집어 들었다. 누르면 삑삑 소리가 나는 고무 공은 이전 산책에서 만난 견주가 쓰지 않는 장난감이라며 준 것이었다.

, 물어와!”

B가 공을 던짐과 동시에 A는 제 몸이 총알처럼 튕겨 나가는 것을 느꼈다. 정신을 차린 것은 의기양양하게 입에 공을 덥석 문 다음이었다.

‘...’

. 데굴데굴 공이 바닥을 굴러갔다.

내가 지금 뭐 하는 거지...’

A의 눈에 허망함이 번져갔다. 모른 척 재밌게 놀까 하는 유혹에도 흔들렸지만 이대로 공놀이 따위에 정신을 뺏길 수는 없었다. 공을 옆에 치워둔 A가 다시금 B에게로 돌진했다. 짧은 바닥을 가로질러, 의자 위로 뛰어올라 B의 무릎을 딛고 펄쩍 점프!

포포야!”

...이번에도 실패였다. A가 제분을 못 이겨 꿍얼거리는 동안 B는 그런 포포를 빤히 바라보았다.

[강아지가 너무 뽀뽀를 많이 해요]

포포를 바닥에 내려준 B가 노트북에 검색하자 이런저런 글들이 눈에 들어왔다.

[오늘은 강아지가 뽀뽀를 너무 많이 하는 뜻에 대해 알아볼 건데요.]

[강아지가 너무 뽀뽀를 많이 한다는 건 당신을 좋아한다는 뜻입니다.]

[오늘의 포스팅은 여기까지입니다! 도움이 되셨다면 구독과 좋아요 눌러주세요.]

이런 거 말고!”

[Q. 강아지가 뽀뽀를 너무 많이 해요. 내공 100]

[A. 사실상 과시죠?]

아니야!”

물론 B는 포포의 뽀뽀가 싫은 건 아니었다. 나름대로 포포가 저를 좋아한다는 사실에 뿌듯함도 느꼈다. 하지만 이건, 아무리 개가 사람을 좋아한다곤 하지만 이 정도인 게 맞나...? 틈만 나면 얼굴에 꿀이라도 발라놓은 것처럼(어디까지나 비유적인 표현이었다. 개는 꿀을 먹으면 안 되니까.) 돌격했는걸. 게다가 뺨이나 턱이면 또 모른다. 집요하게 입술만 핥아대니 이건 위생적으로도 문제가 생길 것 같았다. 얼굴이 침 범벅이 되는 것도 피하고 싶었고. 한참을 끙끙대던 B는 결국 결단을 내렸다. 마음을 굳게 먹고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관문이 열리며 바람 냄새와 함께 B가 돌아왔다. 10분 나갔다 온 건데도 그가 없는 시간이 어찌나 길게 느껴지던지. 반가움에 AB의 다리에 매달려 환영하다가 정신을 차리고 우뚝 멈춰섰다. 저도 모르게 나가는 이런 격한 반가움의 표시도 너무 적응이 안 됐다. 적응할 생각도 없었지만. 하지만 B가 소파에 앉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쪼르르 달려가 그의 무릎 위로 냅다 올라갔다. A에겐 해야 할 일이 있었으니까. 그렇게 앞발을 B의 어깨에 올리고 눈을 꾹 감은 채 얼굴을 들이민 A는 얼마 지나지 않아 눈을 번쩍 뜨고 말았다.

이게 뭐야...?’

A가 정신없이 달려들던 사이 BA의 머리 뒤로 무언가를 묶어둔 것이다. 그리고 다시 얼굴을 들이밀었을 때 둘 사이를 무언가 말랑하고 단단한 것이 가로막았다. 당황해 눈을 깜빡이던 A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소파 옆의 전신거울을 쳐다봤다. 그리고 그대로 우뚝 굳어버렸다. 노란 오리 부리 같은 것이 주둥이 위로 씌워져 있었으니까.

지금 나한테...’

B의 무릎에서 헐레벌떡 내려와 거울로 달려간 A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입마개를 씌운 거야...?’

 

B는 거울 앞에 서서 망연자실하게 굳어버린 포포를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그러던 중 포포가 천천히 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게, 포포야아...”

개는 사람 말을 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B의 입에선 저도 모르게 필사적인 변명이 흘러나왔다.

“...항상 채울 건 아닌데!”

소용없었다. 포포는 터덜터덜 걸어오더니 B의 발밑에 앉았다. 그리고는 B를 바라봤다. 하염없이.

너 흥분 가라앉을 때까지만... 5분만 하고 있을 거야!”

한편 B의 발밑에 앉은 A는 세상이 무너진 것 같았다.

입마개라니... 입마개라니...’

인간으로서의 자존심도, 굴욕감도 문제였지만 지금은 B가 제게 그랬다는 사실에 한껏 시무룩해졌다. B는 포포가 A가라는 사실을 모른다. 그건 A도 알고 있지만 그런다고 제 눈앞의 입마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AB의 무릎 위에 턱을 올렸다. 그리고는 울상으로 쳐다보았다.

아직 입마개를 한 지 5분은커녕 2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B는 있는 대로 흔들리고 있었다. B의 눈썹은 산을 그렸고 동그랗게 모은 입술은 포포의 속상함을 그대로 느끼고 있는 듯 했다. 불쌍한 표정에 넘어가면 안 된다... 안 된다... B의 다짐에도 불구하고 조금만 더 밀면 넘어갈 듯한 표정을 본 A는 더 힘을 내었다.

끼잉... 끼이잉...”

애처로운 소리가 들려오자 B는 더 생각하지 못하고 두 손을 들어버렸다.

알았어, 알았어. 빼줄게...”

B가 입마개를 풀어주자 A는 앞발을 들어 제 주둥이를 만지작거렸다. 확실히 사라졌다. 하지만 서운함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그래서 B에게 등을 홱 돌렸다.

포포야, 화 풀어...”

B의 간절한 목소리에 A의 마음이 잠시 흔들렸으나 여전히 꿋꿋하게 몸을 돌리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꼬리는 조금 흔든 것 같았지만.

우리 포포, 간식 먹을까?”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난 B는 강아지용 수제 간식을 꺼냈다. 아까 입마개를 사면서 같이 구매한 비장의 무기, ...였다. 바스락거리며 간식 봉지를 뜯는 소리에 A의 의지와는 다르게 귀가 쫑긋 돌아갔다. 이어 풍겨오는 고소한 냄새에 결국 홱 돌아보고 말았다. 그렇게 둘은 고구마 간식 2개로 극적인 화해를 했다.

A가 간식을 뜯으며 바닥에서 뒹굴거리던 때였다. B의 전화벨이 울렸다. B가 친구와 종알종알 대화하는 모습을 보던 A의 마음이 흐뭇하게 풀어져 갈 때였다. 한동안 잊고 있었던 폭탄이 다시 등장하고 말았다.

“...B, 저번에 말했던 여소, 정말 생각 없어?”

 

 

6. 혹시 비숑 안에 사람 있나요? (1)

 

나한테는 A 언니가 있다니까?”

당장이라도 다시 짖을 준비를 하던 AB의 말을 듣고 차분하게 멈췄다.

사귀라는 것도 아니고 한 번 만나보기만 하는 건데, 뭐 어때.”

A가 다시 자리에서 들썩거렸다. 하지만 눈치 없게 B 친구의 끈질긴 설득은 계속되었다.

그치만...”

, B. 너 연애해본 적 없지?”

갑자기 친구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또 무슨 말을 하려고. 경계하는 A에 비해 B는 별 의심 없이 말을 받았다.

. 나한텐 A 언니밖에 없으니까.”

‘B...’

대쪽같은 B의 마음에 A의 마음이 찡해졌다.

그 언니는 무슨 죄야, 너한테 공부에 이어 연애까지 가르쳐야 하고.”

“...나 연애공부 열심히 해.”

그게 공부한다고 잘 되는 거면 대한민국엔 이미 연애 자격증 생겼어. 연애는 실전이라니까? 실전,”

B의 기억에 과외쌤 꼬시는 법에 적어둔 항목들이 스쳤다. 그걸 직접 실행했을 때 보였던 A의 반응도. 슬금슬금 뒷걸음치는 모습이 확실히 제가 원하던 반응은 아니었다. B의 흔들림을 감지했는지 친구가 살살 구슬리기 시작했다.

그 언니도 완전 쑥맥보단 연애 센스가 있는 네가 더 매력적이라고 생각할걸?”

아니, 잠깐만요. 전 그렇게 생각한 적 없는데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A는 이전처럼 맹렬히 짖었다. B가 허둥지둥하는 것이 느껴졌지만 A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말리면 안 돼, B!

미안한데, 나 강아지가 또...!”

잠깐만, 끊지 말고!”

문제가 있었다면 이미 한 번 먹힌 방법이라는 점이었다.

할 거지?”

왈왈! 왈왈왈!”

양쪽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B는 정신이 없었다.

그게...”

자신이 그렇게 짝사랑하는 A가 자신의 소개팅을 막으려고 맹렬히 짖고있다는 점은 꿈에도 모른 채 B가 실수로 책상 위에 쌓인 종이 더미를 쳤다. ‘혹시 최근에 UFO를 보신 적 있으신가요?’라고 적힌 전단지가 바닥 위로 사방팔방 흩날렸다. B가 그간 만든다고 매달리던 작업물이었다. 심지어 직접 그린 건지 아주 사실적으로 그려진 초록색 외계인이 엄지를 치켜들고 있었다. 하긴 A가 이렇게 사라지는 것도 B의 계획엔 존재하지 않던 변수였다. 그간 연애부터 결혼에 이민까지 준비한 B는 자신의 계획에 대한 믿음에 조그만 금이 가는 것이 느껴졌다.

‘A 언니를 위해서라면...!’

할게...!”

B가 질끈 눈을 감고 외쳤다. 그러자 갑작스럽게 B를 밀어붙이던 소음들이 멎었다.

진짜지? 장소랑 날짜는 나중에 다시 알려줄게!”

“....”

전화가 끊기자 B가 바닥에 흩뿌려진 종이들을 주우며 엉망이 된 자리를 정리했다. 반면 A는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이제 막 몽글몽글하게 B를 향한 감정이 재정의되는 차였다. 그런데 이 시점에 갑자기 환승이라니.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환승이라고 부를 수도 없었지만. BA가 제게 마음을 갖기 시작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지만!

이럴 수는 없는 거라고!’

A가 세차게 머리를 털었다. 머리를 털자 몸도 털고 싶어 푸드득 몸까지 털었다. 아무튼 뭐라도 방법을 생각해야 했다. 이대로 B를 뺏길 생각도, B의 입술을 뺏길 생각도 없었다. 그렇게 자리에서 빙글빙글 돌던 A는 한 가지 생각에서 우뚝 멈췄다.

‘B는 내 거야!’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에게 B를 넘길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물론 얼굴을 알아도 마찬가지지만. 난생처음 느껴보는 생소한 감정이 A의 마음에 끓어 넘쳤다.

 

마침내 그 날이 다가왔다. 대망의 소개팅 날이었다. 오랜만의 약속에 차려입은 B는 누가 봐도 귀여웠다. 하얗고 폭신폭신한 니트에 검은 체크 스커트, 그 위로 베이지색 코트를 입고 작은 리본 모양 귀걸이도 했다. 원래 말랑말랑한 매력이 있는 B였지만 이렇게 입으니 사랑스러움이 극대화되어 누구라도 껴안고 뽀뽀를 퍼붓고 싶게 생겼다. 물론 이는 A의 주관적인 시선이었지만.

누가 이렇게 예쁘게 하고 나가래?’

A가 속으로 비명을 내지르는 사이 B는 총총 현관으로 향했다.

포포야, 언니 오늘 저녁 약속 있으니까 집 잘 지키고 있어야 해.”

순순히 보내줄 줄 알고?’

얌전히 B의 쓰다듬을 받던 A는 이전에 익힌 필살기를 발휘했다. 애처로운 강아지 눈망울이 B를 한껏 올려다 봤다.

나는 지금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강아지다... 나는 지금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강아지다...’

히우우...”

A가 자기 최면을 걸며 끙끙대는 소리도 함께 냈다. 그러자 B의 눈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끼이잉.... ...”

한술 더 떠서 AB의 다리에 머리도 부볐다. 이래도 두고 갈 거냐는 촉촉한 눈망울이 아련하게 떠올랐다.

포포야...”

조금만 더 하면 넘어올 것 같았다. A는 잠시 어디론가 뛰어갔다. 그새 슬쩍 나가려던 B는 툭 하고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에 흘끔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포포가 물어온 것은 노란 공이었다. 꼭 이걸 줄 테니까 가지 말라고 하는 것 같았다. 결국 B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안녕하세요, 오늘 만나기로 한 사람인데요... 혹시 저희 만나는 곳을 애견동반 가능한 술집으로 변경할 수 있을까요...?”

 

A는 고개를 치켜들고 당당하게 걸었다. 혼신의 힘을 다해 얻어낸 B의 옆자리였다. 약속 장소에 도착할 때까지 자존감이 떨어질 줄을 몰랐다. 술집에 도착해서도, 자리로 안내받을 때까지도 그랬다.

안녕하세요, C에요. 친구한테 얘기 많이 들었어요, B .”

B가 자리에 도착하자 먼저 와서 앉아있던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금발 생머리의 여자였다. 키는 B보다 조금 컸고 이목구비가 뚜렷했다.

뭐야, 예쁘잖아!’

A가 떡 벌어진 입으로 C를 쳐다보고 있는 사이 B도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B의 뺨에 붉은 기가 도는 것만 같았다.

, 너 얼굴에 그거 뭐야?! 조명? 조명 때문인 거지, B??’

안녕하세요. 갑자기 약속 장소 바꿔서 죄송해요. 찾으시느라 고생하셨죠?”

A는 둘 사이를 훼방 놓으려고 한 짓이었는데 도리어 CB의 호감을 산 것 같았다. A가 눈을 세모꼴로 뜨고 C를 노려봤다.

에이 아니에요. 이 친구가 포포군요? 포포 안녕~”

포포야, 인사할까?”

A는 여전히 C를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눈으로 쳐다봤다. 그것도 아주 명확하게.

, 포포가 사람한테 낯을 좀 가리나...봐요.”

B가 어색하게 웃으며 상황을 수습하고 얼른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A도 그 옆으로 뛰어 올라가 B의 옆자리를 차지했다. 하지만 C는 개의치 않고 B의 맞은편에 앉았다. 아니, 당연한 건가? 생각해보면 소개팅이든 커플이든 마주 보고 앉는 것이 일반적이지 않은가. 뒤늦게 이를 깨달은 AC가 앉은 쪽을 허망하게 바라봤지만 이미 그가 자리를 잡은 뒤였다.

괜찮아... 아직 시간은 많아.’

A가 제 앞으로 나온 물그릇의 물을 춉춉거리며 다음 수를 노렸다.

여기는 이 메뉴가 맛있대요.”

, 진짜 맛있어 보여요.”

곁들일 술은 와인 괜찮으세요?”

, 좋아요!”

A가 시퍼렇게 눈을 뜨고 있는데도 두 사람은 하하호호 웃으며 대화를 나눴다. 과외를 할 때 자신을 수줍게 훔쳐보던 B의 모습은 없었다. 처음엔 낯을 조금 가리는 듯하더니 편안하게 농담을 하며 재미있게 대화를 이끌어가는 모습이 A의 눈에는 신선하게 보였다. 저에게도 이런 모습을 보여줬다면 더 일찍 호감이 생겼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때, B의 눈이 초승달처럼 접히며 일전에 A를 두근거리게 한 그 해사한 미소가 나왔다.

안 돼! 그거 보여주면 안 돼!’

저도 이제야 본 건데, 쟤한텐 첫날부터 보여주다니. AC를 돌아보자 그의 시선은 B에게 고정된 채 귀가 새빨갛게 물드는 것이 보였다.

절대 안 돼! 내 거야, 눈 감아!’

마침 종업원이 레드와인 두 잔을 내오자 씩씩대던 A의 눈이 번뜩였다. 쨍하고 와인 잔이 경쾌하게 맞닿는 소리가 났다. C가 잔을 입에 가져다 대자 A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냅다 C의 팔에 머리를 들이받았다.

...”

포포야...!”

붉은 액체가 C의 옷을 물들이고 테이블 위를 적시자 당황한 눈동자 세 쌍이 흔들렸다. 두 쌍이 아니라 세 쌍이.

너무 심했나...?!’

냅다 들이받은 사람, 아니 개 치고 A는 상당히 동요하고 있었다. 꼭 사고를 치고 주인에게 걸린 개처럼 저도 모르게 딴청을 피우듯 고개를 비스듬히 돌렸다.

, 인간으로 돌아가면 꼭 세탁비를 물어드리겠습니다...’

힐끔힐끔 눈치를 보며 A는 앞발을 꼼지락거렸다. 잘못된 짓이라는 건 알지만, 알지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전력으로 이 둘의 성사를 막아야겠다는 생각밖에 나지 않았다.

너무 죄송해요...”

허허, 괜찮아요, 강아지가 그럴 수도 있죠.”

B의 사과에 C가 털털한 너털웃음을 지으며 신경 쓰지 말라며 손을 내저었다. 화장실에서 옷 좀 닦고 오겠다고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A는 아예 B의 옆에 엉덩이를 답삭 붙이고 앉아 앞다리를 쭉 뻗었다.

여긴 내 자리야!’

옆에서 B가 꽤 엄한 목소리로 혼을 내는 소리가 들렸지만, 어차피 B가 자신에게 진심으로 화를 내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기에 A는 못 알아듣는 척 고개만 갸웃대며 애교를 부렸다. 진실을 아는 누군가가 봤다면 강아지 다 됐다고 혀를 찰 법한 광경이었지만 A는 기왕 이렇게 된 거 있는 힘 없는 힘을 다 끌어모을 생각이었다. 그게 비록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스스로 깎아 먹는 짓이라고 하더라도. 그런 A의 얄팍한 수가 통한 건지 결국 B도 혼을 내는 것을 관두고 결국 그를 쓰다듬어주었다.

C가 돌아오자 술자리는 계속되었지만, A의 사소한 방해 공작도 계속되었다. 둘의 눈 마주침이 조금이라도 길어진다 싶으면 냅다 짖어 버린다거나 플러팅 멘트 비슷한 것만 들려도 쩝쩝대며 뭔가 주워 먹는 척을 해 제게로 주의를 돌렸다. 그러나 그런 A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BC에게 푹 빠진 것 같았다. 종종 C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거나 그가 하는 행동을 멍하니 보곤 했으니까.

 

한편, B에게는 포포의 방해 공작이 먹히지 않는 이유가 있었다.

저 보조개...!’

C가 웃자 왼 볼에 움푹 패인 보조개가 드러났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새로운 이의 매력에 푹 빠지는 계기가 되었겠지만, B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C의 얼굴 위로 양 볼에 보조개가 패인 채 웃는 A의 얼굴이 겹쳐 보였으니. 그 뿐만이 아니었다.

“B , 이거 맛있어요.”

C가 음식을 권하며 적당한 크기로 잘라 제 접시에 덜어주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시원한 미소를 지으며 칼질을 하는 A의 모습이 그 위로 동동 떠올랐다.

‘B, 이거 먹어봐. 엄청 맛있다?’

B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접시를 받아들었다. 옆에서 야단법석을 떠는 포포의 소리도 잠시간 귀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였다.

살짝 매운데, 전 그게 더 좋더라구요.”

, 매운 거 좋아하시는구나...”

B는 저도 모르게 ‘A 언니도 그런데.’라고 말할 뻔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급하게 입을 다물었다. 처음부터 다른 사람을 소개받는다고 해도 A에 대한 제 마음이 변할 거라 생각하진 않았지만, 이 정도로 그의 생각만 날 줄은 몰랐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타인과의 만남으로 짝사랑을 극복한다는 건지. 이건 제 앞에 누가 있어도 마찬가지였을 테다. 상대가 무엇을 하더라도 생각의 끝은 전부 A에게로 귀결됐다.

‘A 언니가 여기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냅킨으로 입가를 닦으며 B가 생각했다. 제 옆에 A가 함께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르고.

 

식사도 슬슬 끝나갈 무렵, A는 말 그대로 환장할 지경이었다.

‘B, 제발 여기 좀 봐줘! 저분 얼굴 뚫어지겠다!’

AB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제가 떠올릴 수 있는 모든 짓은 다 해봤다. 하지만 그 노력도 부족했던 건지, B는 갈수록 C에게서 눈을 떼질 않았다. 심지어 그에게 아련한 눈빛마저 종종 보내곤 했다. 눈앞에 그렇게 좋다던 제가 있는데도 당최 눈을 떼지 못하는 B를 보자 A는 발등에 불이 붙는다는 표현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물러날 A가 아니었다. 그리고 행운의 여신도 그의 편이었는지 다시금 머리를 한껏 굴리던 A에게 퍼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끼이잉... 끼잉, 끼이이잉...”

포포야, ...”

낑낑 앓는 소리를 내던 AB와 눈을 마주치자마자 힘없이 옆으로 찰팍 쓰러졌다. 그뿐만일까, 다리도 쭈욱 뻗고 몸도 파들파들 떨었다.

포포야!”

갑작스러운 강아지의 변화에 A의 생각에서 번쩍 깨어난 B의 눈과 입이 동그래졌다. 이건 누가 봐도 심각하게 아픈 모습이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B는 포포를 번쩍 안아 들었다.

정말 죄송한데 저 지금 동물병원에 가봐야겠어요! 나중에 다시 연락드릴게요!”

평소 나긋나긋하던 B의 목소리가 급하게 튀어나왔다. 같이 가겠다는 C의 말을 한사코 거절하며 B는 자리에서 뛰어나가 택시를 잡았다.

 

선생님, 포포는 어떤가요? 괜찮은 거 맞나요?!”

보호자 분, 진정하고 들으세요.”

눈가에 눈물마저 글썽거리며 다급하게 검사실로 들어온 B를 보며 수의사가 진지하게 말했다. 순간 B의 머릿속에서는 온갖 시나리오가 스쳐 지나갔다.

선생님, 저 이렇게 우리 포포 못 보내요...!”

꾀병입니다.”

두 사람의 말소리가 동시에 울려 퍼졌다. 그 탓에 한동안 눈망울만 끔뻑거리던 B는 수의사가 무슨 말을 했는지 이해하는데 조금 시간이 걸렸다.

“...?”

멍청하게 흘러나온 제 목소리에 B는 조금 정신을 차렸다. 그러자 주변의 모습이 차차 눈에 들어왔다. 어이가 없다는 듯한 수의사의 표정, 필사적으로 입술을 꾹 물은 테크니션, 그리고 검사용 침대에 퍼질러진 하얀 털 뭉치.

하지만 분명 엄청 아파했는데...”

이걸 보세요.”

수의사가 모니터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검사실의 영상이 고스란히 찍혀있었다. 응급사태라 판단한 의료진이 동분서주하며 잠시 검사실을 비우자 누워서 경련하듯 몸을 떨던 하얀 덩어리가 움직임을 멈추더니 슬쩍 고개를 들고 두리번거렸다.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자 포포는 기지개를 쭉 켜더니 몸을 한 번 푸르르 털었다. 심지어는 검사실 바닥에 떨어진 의료용 마스크를 발견하고는 혼자 가지고 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문밖에서 인기척이 들리자 냅다 눈을 감고 그 자리에 털썩 드러누웠다.

검사를 해도 아무 이상이 없길래 혹시 놓친 증상이 있나 해서 CCTV를 돌려봤더니 이 녀석이 이러고 있더군요.”

“...”

비숑이 대개 그렇긴 하지만 지능이 정말 높은 아이네요. 저희도 깜빡 속아 넘어갈 뻔했습니다. 거의 뭐, 사람 수준이에요, 사람.”

그럼, 그럼, 포포는 괜찮은 건가요...?”

황망한 얼굴로 의사의 말을 듣던 B가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침대 위에 누워있는 포포를 살폈다.

, 아무런 이상 없습니다. 건강 상태도 아주 좋아요.”

그럼 지금은 왜...”

그렇게 난리를 쳤는데 피곤할 만도 하죠.”

그냥, 졸리다고 자는 거라고요...”

.”

네에...”

B는 멍하니 포포를 넣은 이동장을 받아 들었다. 의사의 말에 뭐라고 반박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포포는 쿨쿨 잘만 자고 있었다. 안도와 황당함이 동시에 밀려오며 B는 벌어진 입 밖으로 영혼이 스멀스멀 빠져나가는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가 모르는 사실이 하나 더 있었다.

ACCTV 영상 재생이 끝날 때까지 냅다 자는 척을 하고 있었다. 이제는 진짜로 잠들어버려 더 이상 연기를 할 필요가 없어졌지만.

 

 

7. 아무튼 그렇게 됐습니다.

 

깜빡, 깜빡...

A의 눈에 낯선 천장이 아른거렸다. 그러니까, 한 번도 본 적 없는...

여긴 대체...”

정신이 들어요?”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A가 고개를 돌렸다가 비명과 함께 펄쩍 뛰어올랐다.

... ...!”

?”

, 외계인!”

선명한 초록색 피부와 커다란 검은 눈을 지닌 생명체를 보며 A가 소리질렀다.

너무 놀라지 말아요.”

안 놀라게 생겼어요?!”

외계인은 길다란 손가락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여긴 어딘지, 자신은 왜 여기에 있는지, 목적이 무엇인지 같은 질문이 A의 입 밖으로 줄줄 튀어나오려던 찰나, 외계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서, 개로 변한 건 어때요?”

...?”

그러고 보니 자신은 개로 변하지 않았던가? A가 급하게 양손을 들어 올리자 하얗고 복슬복슬한 털 뭉치가 아닌 사람의 손이 보였다. 게다가 이제야 깨달았지만, 아까부터 사람의 말도 하고 있었다.

, 나 언제 B랑 딥키스를?”

안 했는데요.”

.”

A가 머쓱하게 입을 다물었다. 다물었다가... 다시 번쩍 열었다.

그걸 그쪽이 어떻게 알아요?!”

“...”

“...”

이어지는 숨막히는 적막 속에 A과 내내 마주치고 있던 외계인의 시선이 이리저리 돌아갔다.

“......으우윙...? 윙윙...삐리삐리삐삐....”

이제와서 말 안 통하는 척해봤자 다 알아요.”

“...”

“...”

, 이래서 눈치 빠른 지구인은...!”

외계인이 한쪽 입가를 얄밉게 삐죽거렸다. 어처구니를 상실한 A가 뭐라 하기도 전에 길쭉한 초록손가락이 A의 이마를 꾸욱 눌렀다. 그러자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환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 ??”

아무튼 너라면 그 지구인의 소원을 이뤄줄 수 있다고 믿는다.”

엄지를 척 들은 외계인의 잔상을 마지막으로 A의 몸이 추락했다.

 

***

 

“...!”

A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익숙한 공간이었다. 급하게 양손을 살피자... 하얗고 복슬복슬했다.

그럼 아까 그건 뭐야?’

우웡...”

목소리를 내봐도 마찬가지였다. 그동안 그랬듯이 개소리만 들렸다.

그렇다는 건...’

뜬금없는 외계인. 제 상황을 알고 있는 상대. 여전히 개인 자신. 이 모든 것을 빠르게 조합한 A는 냉철한 결론을 내렸다.

... 개꿈이군.’

 

A가 뒷다리로 제 머리를 북북 긁으며 천천히 기억을 되짚었다. 강렬한 꿈 때문에 잠시 잊었지만 분명 자신은 전날 꾀병을 부려 한바탕 소동을 일으키고 잠들었다. 아무리 상냥하고 다정한 B라 하더라도 이번에는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몰랐다. 어떻게든 뒷감당을 피하려고 자는 척하다가 집에 돌아오면 애교라도 부려서 상황을 무마하려고 했는데, 안타깝게도 강아지의 몸은 착실하게 본능을 따라 그대로 잠에 빠져버린 것이다.

큰일 났다.’

삐질, 어쩐지 식은땀이 흐른 것 같았다. 조용히 커다란 눈만 도르륵 굴린 A의 눈에 제 바로 옆에서 새근새근 잠든 B의 모습이 들어왔다. 노란 햇빛이 엷은 커튼 사이로 넘어와 방을 한가득 채웠다. 그 빛에 물들어 길다란 속눈썹을 드리운 B의 모습은 마치 장미에 둘러싸여 깊은 잠에 빠진 동화 속 공주의 모습 그 자체였다. 그 성의 주민들도 모두 마법에 걸려 함께 잠에 빠졌댔지. 분명 그 고요함은 지금과도 같을 것이다. 그렇게 모든 것이 저주를 풀어줄 상대를 기다려왔다. 진실한 사랑의 입맞춤으로 마법에서 구원해줄 유일한 존재를. 그 모습을 오래도록 눈에 담은 A는 조용히 한 걸음을 디뎠다.

‘B, 나 이제는 전부 알아.’

멀쩡한 침대를 내버려 두고 제 옆인 바닥에서 잠든 B는 분명 전날 어이없어하면서도 안심이 돼서 긴장이 풀렸을 것이 분명하다. 그 와중에도 혹시나 정말 아픈 게 아니라는 게 확실한지 걱정이 되어 포포의 곁을 떠나지도 못했겠지.

넌 엄청 따뜻한 사람이야.’

A가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발갛게 달아오른 뺨의 솜털이 햇빛을 받아 복숭아처럼 탐스럽게 반짝였다. 그 못지 않게 귓가에 들리는 규칙적인 숨소리가 달았다.

착하고, 다정하고, 눈물겹게 사랑스러워.’

. 잠시 A의 이마가 B의 이마에 맞닿았다.

그런 네가 좋아서 꼭 첫사랑에 빠진 어린 애처럼 어쩔 줄 모르겠어.’

그대로 둘 사이의 거리를 좁히며 AB의 도톰한 입술에 닿았다. 말랑하고 따끈한 감촉이 그대로 느껴졌다.

그러니까 이렇게라도 이 마음을 전할게.’

B의 닫힌 입술 사이로 A의 혀가 부드럽게 파고들었다. 깊숙하고 따뜻한 제 애정을 전하며.

그때, B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 근데 나 지금 개 아닌가?’

갑작스러운 현실이 A의 머릿속을 스치며 그를 다시 현실로 돌려놓았다.

자기가 개랑... 딥키스를 했다는 걸 B가 알면...’

큰일이다. 이번에는 A의 등 뒤로 흐르는 식은땀이 두 배로 늘어난 것 같았다. B가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수마를 몰아내는 동안 A는 열심히 눈동자를 굴렸다.

딥키스를 하면 인간으로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환한 빛도, 팔랑이는 장미 꽃잎도, 퀘스트 달성 효과음도 없었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 안 되는데.’

그 자리에 우뚝 굳어버린 A가 무엇이 잘 못 되었는지 급하게 반추하는 동안 B의 눈이 느리게 끔뻑였다.

“...A, 언니?”

?”

나 아직 꿈꾸는 중인가... 언니가 보이네...”

B가 웅얼대며 가물대는 눈꺼풀을 슬슬 닫았다.

, , 내가, 내가 보여?”

A가 덥썩 B의 뺨을 잡았다. . 꾹꾹. 말랑거리는 볼의 감촉이 손끝으로 생생하게 전해졌다. 그러니까, 손끝으로. A의 눈에 B의 뺨을 주물 대고 있는 제 손이 들어왔다. 이번에는 확실하게 사람의 손이었다. A가 화들짝 손을 떼더니 이번엔 허겁지겁 제 얼굴을 만져봤다. 매끈한 살결, 동글동글한 사람의 이목구비, 특히나 촉촉하지 않은 코와 얼굴 옆쪽에 제대로 붙어있는 귀...

“B, 일어나봐! 이거 꿈 아니야!”

다시 반쯤 졸고 있던 BA가 와락 끌어안았다. 봄이 완연한 창밖으로 꽃잎이 살랑살랑 흩날리고 있었다.

“...진짜 A 언니야?”

, 진짜 나야. B 너에게 꼭 전하고 싶은 게 있었어. 지금, 이 모습으로.”

그동안 어디 있었어? 왜 연락 안 했어? 어떻게 돌아온 거야? 어쩌다...”

정신을 차리자마자 물음표 살인마가 된 B의 질문 공세에 A는 얼떨결에 하나하나 대답하기 바빴다.

나 계속 여기 있었는데, 연락은 못 한 거고, 딥키스로 돌아왔는데, 내가 그게, 포포였거든, 그래서...”

말을 뱉고 나서 A는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사실 그동안 함께 지내던 개가 사람, 그것도 사라졌던 자신이라고 주장한다면 그걸 믿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당장 A 본인도 한동안 믿지 못했던 일이었는데. 게다가 이 갑작스러운 사건의 원인이나 이유도 몰랐다. 그런데 대체 누가 그런 황당한 소리를 듣고 덥썩 그렇구나, 하고 납득하겠느냔 말이다.

그러니까... A 언니가 갑자기 포포로 변했는데 나랑 키스해서 다시 사람으로 돌아왔다고?”

방금까지만 해도 환하게 웃고 있던 B의 표정이 차츰 심각하게 변해갔다. A는 꿀꺽, 침을 삼키며 불현듯 깨달았다.

보통... 좋아하던 상대가 갑자기 잠수를 탔다가 다시 나타나서는 하는 소리가 네가 키우던 개로 변했었다고 하면...’

B의 시선이 바닥을 향했다. 손으로 턱을 괴고 아무 말이 없는 그를 보자 이번에는 식은땀이 세배로 흐르는 것 같았다.

‘...자길 우습게 본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그런 헛소리를 믿을 것 같냐고?’

“...역시 그런 거였어.”

B가 중얼거리자 A가 다급하게 말을 덧붙였다.

진짜야, 믿기지 않겠지만 B 너한테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어. 절대로 내가 널,”

“...우리, 정말로 운명인 거였네요!”

기만... ?”

B의 눈이 반달모양으로 접히며 화사한 웃음을 지었다. A는 저도 모르게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역시 그럴 줄 알았어요. , 언니랑 같은 곳에 점이 있잖아요. 그러니까 이건 운명의 시련 같은 거였던 거죠!”

...? 어어, ...”

어쩐지 그래서 그런 거였다고 두손을 마주잡고 즐겁게 조잘거리는 B의 말을 들으며 A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생소하지만 싫지 않은 부드럽고 따스한 감촉이 논리적인 사고를 방해했다.

운명.., 시련...?’

A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지만, 아무튼 B의 말을 조합하자면 저를 믿는다는 뜻이었다. 개로 변했던 당사자인 저보다 A의 귀환을 더 기뻐하며 팔랑팔랑대는 사랑스러운 미소를 지어주는 B의 얼굴을 보자 A의 심장박동이 더욱더 거세어졌다. 쿵쿵 울려대는 소리는 점차 커져 A의 귓가를 가득 채웠다. 강한 충동이 A를 사로잡았다. 그리고 입에서 튀어나오는 말을, A는 멈추지 않았다.

“B, 아직도 내가 좋아?”

놀란 얼굴이 된 B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A가 말을 이었다.

나는, 네가 좋아! 포포가 되어 너의 진짜 모습을 알게 되면서 어느 새부턴가 B 네가 너무 좋아졌어...”

B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래서, 바보같이 늦었을지도 모르지만, 너랑 앞으로 함께 있고 싶어. ...아는 언니 말고... 친구 말고... 좀 더 특별한 사이로..."

!”

A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B가 대답했다.

아니, B, 내 말 제대로 들은 거 맞아?”

! A 언니랑 결혼할게요!”

? 우리 아직 사귀지도 않았는데? 아니, 그것보다... ,”

A가 쉽게 떨어지지 않는 입을 달싹거리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B , C? 씨한테 마음? 그런 거? 있는 거 아니었어?”

아무렇지 않은 척, 태연하게 말을 하려 노력한 결과가 이랬다. 잘 모르겠다는 식으로 쿨하게

어조를 유지하기는 무슨, 말끝마다 의문형처럼 올라가는 게 누가 들어도 구질 대는 티가 팍팍 났다.

물론네가진짜그분한테마음이있다고해도내가절대후회하지않게해줄게진짜야.”

중간에 숨도 쉬지 않고 한숨에 그렇게 덧붙인 A는 긴장한 듯 다문 입술에 지긋이 힘을 주었다.

, A 언니 일편단심인데요?”

?”

무슨 소리냐는 듯이 눈을 끔뻑이는 BA도 잠시 멍하니 마주 바라봤다.

하지만 어제 다 봤는데. 내가 얼마나 방해를...”

. A가 입을 다물며 뒷말을 삼켰다. 하지만 B는 전혀 개의치 않아 하는 태도였다. 어쩐지 억울해진 A가 자신이 보고 느낀 점들에 대해 줄줄 늘어놓았다.

, 그분 웃는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고! 눈빛도 완전 뜨겁고!”

A의 줄줄 이어지는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B가 순간 배시시 웃었다.

, 그렇게 외간 여자한테 아무렇게나 웃어주... 왜 그래?”

전 계속 언니 생각하고 있었는데...”

A가 순간 제가 제대로 이해한 게 맞나 싶어 눈만 깜빡거리자 B가 그 자리에서 하던 생각을 하나하나 읊었다. 웃을 때 생기는 보조개, 자상한 성격, 매운 걸 좋아하고 심지어는 휘적거리는 걸음마저 무엇 하나 빼놓지 않고 A의 생각을 떠올리고 있었다고.

이 자리에 언니랑 같이 온 거면 좋았겠다~ 했는데, 진짜 언니랑 같이 가긴 했네요. 제가 원하던 거랑은 많이 달랐지만.”

이번엔 진짜로 데이트하자.”

좋아요.”

“...혹시라도 강아지 동반은 금지야.”

걱정하지 마요.”

B가 싱긋 웃었다.

제 강아지는 포포 뿐이니까!”

 

<완결>

 

 

 

8. 에필로그

 

잠수를 탔던 A가 홀연히 돌아왔다.

주변에서 이유를 묻자 애매하게 둘러대던 그가 얼떨결에 주변에 말하는 걸 깜빡하고 템플 스테이에 가서 디지털 디톡스를 하고 왔다고 말해버리자 어쩐지 진정한 힙스터 취급을 받게 되었다. 그 뒤에 그곳에서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B랑 사귀기로 했다는 말까지 덧붙이자 슬금슬금 주변에서 템플 스테이가 유행하는 사건이 있었지만 이마저도 가벼운 화젯거리가 됐을 뿐, 며칠 뒤 본격적으로 시험 기간이 시작되자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AB는 매일매일 꿈만 같은 나날을 보냈다...면 좋았겠지만, 그들에게도 중간고사라는 시련이 닥쳤기에 그러진 못했다. 하지만 도서관 데이트를 할 때면 마주 앉을 때는 왼손잡이인 B의 오른손이 비어 A의 왼손이 슬그머니 B의 자그마한 오른손을 포개었고, 나란히 앉을 때는 B의 오른손이 책상 밑에 숨겨진 A의 왼손 체온을 찾았다. 또 서로의 집에서 쪽잠을 자고 가고, 전공 책을 보며 식은땀을 흘리다가도 눈을 마주치면 환하게 웃고. 그들 나름의 캠퍼스 로맨스를 즐기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시험이 끝나자 두 사람은 간만에 초췌한 몰골에서 벗어나 B의 집에서 노닥거리고 있었다.

“B, 나 충전기 좀 쓸게.”

, 책상 밑에 꽂혀있어요.”

AB의 책상 밑으로 손을 뻗어 더듬거렸다. 그러던 중, 그의 손에 웬 종이 한 장이 집혔다.

혹시 최근에 UFO를 보신 적 있으신 가요?’

엄지를 척 들은 사실적인 묘사의 초록 외계인. 분명 포포였을 적에 B의 집에서 본 적이 있는 전단지였다. 외계인의 그림은 어딘가 익숙했다. 그러니까...

, 그 개꿈!”

A가 저도 모르게 외치자 A의 등 뒤에서 B가 무슨 일이냐는 듯이 한쪽 뺨에 바람을 넣은채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다.

, 다 버렸는데 한 장 남아있었네요.”

B가 잠시 추억을 회상하는 동안 A는 그 이상한 꿈에 대해 잠정적 결론을 내렸다. 사람의 꿈은 무의식의 반영이라고 하지 않던가.

나 이 그림이 인상 깊었나 봐. 이거랑 똑같이 생긴 외계인이 꿈에 나온 적 있다?”

아하하, 정말요?”

B가 웃음을 터뜨렸다. A도 따라 웃었다.

진짜 황당하다, 그치?”

예전에 제 꿈에도 나왔길래 그린 거였는데.”

A의 웃음이 뚝 멈췄다.

진짜 신기한 꿈이었어요... 저는 상대가 외계인이라 사람 말이 안 통할 줄 알았거든요.”

“..., 그런데?”

그래서 제가 먼저 외계어로 말을 걸었어요!”

어쩐지 A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이 뒤는 듣지 않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하지만 호기심은 고양이를 죽인다고 했던가. A는 초조하게 묻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넌 뭐라고, 했는데...?”

으우윙! 윙윙! 삐리삐리삐삐!”

A의 까만 눈동자가 서서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 요상한 말. 분명 꿈속 외계인이 딴청을 피웠을 때 들어본 적 있는 소리였다.

그으건 무슨 뜻인데?”

제가 어렸을 때 외계인을 만나면 대화하려고 만든 외계어예요!”

솔직히, 외계인들이 들으면 노발대발할지도 모르겠지만 어차피 외계인 생긴 건 거기서 거기니까 그림은 우연의 일치라고 치자. 하지만 이런 소리를 똑같이 생각해낼 수 있나? 그것도 B가 직접 만들었다는소리를? A가 커다란 눈을 천천히 굴리는데 B의 말이 이어졌다.

, 제 소원을 들어주겠다고도 했어요. 제가 자기 전에 별똥별을 보고 소원을 빌었거든요? 근데 그 별똥별이 사실 자기네 우주선이었대요. 제가 빈 소원의 주파수가 우주선이 쓰는 주파수랑 겹쳐서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했었나...?”

“B 넌 무슨 소원을 빌었는데?”

B가 배시시 눈을 접으며 웃었다.

당연히 A 언니랑 잘 됐으면 좋겠다고 빌었죠.”

그게 끝이야? 진짜 이상한 꿈이다.”

짝사랑 중이던 B가 빌법한, 지극히 평범한 소원. 그럼 꼭 자신이 개로 변할 이유는 없지 않았나? 아니, 어차피 개꿈인데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우습지만. 찜찜했지만 A는 그저 희한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넘기려고 했다.

만약 그게 안 이루어지면 대신 어떤 소원을 빌겠냐고도 해서...”

더 있었어?”

당연히 거기서 꿈 이야기는 끝일 줄 알았기에 A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 보험 든다고 생각하래서 제가 그땐,”

어쩐지 B가 수줍은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든 언니한테 찐~하게 키스라도 받아보고 싶다고 했어요.”

A의 턱이 떨어지며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만약 그들이 어떻게든이라는 말을 A가 강아지의 모습이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면... 아니다, 역시 너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상식적으로.

아냐, 그럴리 없어... 외계인 같은 게 진짜로...”

어떻게든 중얼거리며 고개를 흔드는 A를 바라보던 B가 엄지를 치켜들었다. 그림 속, 그리고 A의 꿈속 외계인이 취한 것과 똑같은 포즈였다.

그리고 마지막에 외계인이 이러더라고요. 포즈가 웃겨서 일부러 전단지 만들 때도 그 자세로 그렸어요.”

A가 열심히 속으로 외계인 가설을 부인하고 있을 때, B가 생각났다는 듯이 박수를 쳤다.

근데 언니도 저한테 키스해서 사람으로 돌아왔다고 했잖아요... 우와, 사실 꿈이 아니라 현실이었던 걸까요?”

하하하... 에이, 설마...”

, 역시 그렇겠죠?”

, .........”

A가 어떻게든 평정심을 찾으려 노력하며 말했지만 어째서일까, 한 번 피어오른 의심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어쩐지 저 먼 하늘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그들에게 엄지손가락을 들어 올린 것만 같은, 그런 기분이 드는 화창한 날이었다.

 

그런데 A 언니,”

?”

언니가 포포였을 때 막 진짜 개처럼 짖었던 거 말이에요,”

“...”

진짜로 언니가 멍멍하고 짖어야지, 하고 생각하고 짖은 거예요?”

“...”

?”

B의 맑은 눈망울을 마주한 A의 눈동자가 다시 흔들리기 시작했다. 인간으로 되돌아왔다고 잠시 잊고 있었던 스스로 인간의 존엄성을 내려놓았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내가, ... 기억이, 안 나는데...”

, 제가 전화 받을 때도 그랬구, 소개팅에서도... , 꾀병! 그것도 언니가 진짜로 드러누워서 막 아픈 척을...”

! 저기 UFO!”

A가 번쩍 하늘을 향해 손가락질하자 B의 고개도 따라 올라갔다.

어디? 어디요?”

저쪽에...! 저 구름 보여?”

아까 제 입으로 외계인은 사실이 아닐 거라고 했으면서 AB의 주의를 돌리기 위해 급하게 그들을 팔아먹었다. 이건 양심에 걸리지도 않았다. 멀쩡한 사람을 개로 만들어서 그런 수모를 겪게 했으면서, 이 정도는 수지타산조차 안 맞았으니까. 앞으로 이 주제가 다시 나오면 어떻게 빠져나가면 좋을지에 대해 생각하던 A는 푸르른 하늘을 다시금 가리키다가 이내 B와 함께 와르르 웃어버렸다.

두 사람에게 주어진 시간은 많았고,

앞으로의 미래엔 계속 함께일 테니,

80년분의 대책을 세워야겠다고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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