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시오이] 천개의 태양 전문 공개
01.
모래로 된 바다
‘사막은 모래로 된 바다야.’
어린 오이카와는 그렇게 생각했다. 물론 그는 한 번도 바다를 본 적이 없었지만, 무희들 중엔 바다를 본 이들이 있었고, 그들에게 이야기를 들으며 상상으로 바다를 그렸다. 소금물이라서 마실 순 없지만, 사막의 모래만큼 물이 있단다. 물이 너무 많아서 넘실거려. 한 무희가 그렇게 말했던가, 물결 위로 산산 조각나는 햇빛이 그렇게 아름답다고. 눈이 부셔서 뜰 수 없을 정도였어. 천 개의 태양이 뜬 것 같았다니깐. 나도 나중에 바다에 데려가 줘요! 무희는 기분이 좋았는지 그리 말하는 오이카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러겠다고 말했다. 그 약속이 지켜질 날은 평생 오지 않았지만.
모래만 가득한 척박한 땅에서도 인간은 뿌리를 내려 살아갔다. 같은 식물이라도 잔디와 나무가 살아가는 방식이 다르듯 사막이라는 한정적인 공간에서도 사람들은 각기 다른 삶을 살았다. 어떤 이들은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세워진 도시에서, 어떤 이들은 장사를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자유롭게 이곳저곳을 떠돌며. 그 중 오이카와 토오루의 어미는 떠돌이 무희였다. 큰 천막을 싣고 낙타로 사막을 횡단하는 그들은 춤을 보이고 웃음을 팔며 사내들과 몸을 섞었다. 오이카와의 어미 역시 그랬다. 여느 때와 같이 도시를 순회하던 그들 무리가 가장 번성한 도시에 멈춰선 날, 무희들은 마침 그곳에서 열린 대부호의 잔치에 불려갔다. 오이카와의 어미는 사람을 홀리는 재주가 있다는 평판이 자자한 사람이었다. 매력적인 춤사위와 빼어난 미모도 한몫을 했지만, 그 특유의 분위기가 있었다. 첫눈에 그녀에게 푹 빠져 하룻밤을 보내겠다며 거금을 치르는 이들은 손으로 꼽기 어려울 정도로 넘쳐났다. 잔치를 연 남자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그렇게 밤이 지났고, 다음 날, 무희들은 바람처럼 떠나갔다. 어느 날 그녀는 자신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놀랍게도 단순한 변덕으로 아이를 낳기로 했다. 아이의 아비가 누구인지는 그녀조차 몰랐다. 열 달이 지나 사내아이를 낳은 무희는 오이카와라는 자신의 성과 토오루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허나 무희들에게 필요한 것은 계집아이였지, 사내아이는 필요가 없었다. 아기를 보느라 손님을 받을 수 없게 되자 그의 어미마저 그를 짐짝처럼 취급했다. 그렇게 오이카와 토오루는 환영받지 못하는 세상에 태어났다.
오이카와가 다섯 살이 되던 해, 무희들은 다시 가장 번성한 그 도시에 들렀고, 오이카와의 어미는 아이를 데리고 대부호의 집을 찾았다. 당신의 아이예요. 그렇게 말하곤 항상 그랬듯 바람처럼 떠나갔다. 그곳에 오이카와 토오루를 남겨둔 채. 남자는 공식적으로 아이가 제 자식이라고 인정하진 않았으나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시종으로 들였다. 그날부터 오이카와 토오루는 우시지마 가에서 살게 되었다.
모두들 자고 있을 동틀 녘에 시종들의 아침은 시작된다. 찡그린 낯으로 덜 깬 눈을 비비며 시작하는 아침이지만, 유독 오이카와는 제일 먼저 일어나 웃는 얼굴로 동료들을 반겼다. 그러다 보니 잘 잤어요? 라며 인사하는 그에게 호감을 갖지 않는 것은 불가능했다. 예외가 있다면 아침부터 재수 없다며 구겨진 얼굴로 대꾸하는 그의 소꿉친구, 이와이즈미 하지메 정도일까. 머리맡에 둔 물 잔으로 얼굴을 두어 번 문댄 이들은 곧 제가 담당한 일을 하러 갔다.
부엌으로 간 오이카와는 우선 커다란 물 항아리를 들고 집 밖에 있는 우시지마가의 전용 우물로 향했다. 물을 긷는 것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지만 들고 돌아오는 것이 상당한 골칫거리다. 특히 주인어르신과 그의 가족을 깨우지 않기 위해 살금살금 움직이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다음은 청소. 사막이니만큼 모래 먼지가 이곳저곳에 매일 쌓여서 청소할 양이 상당했다.
“망할카와, 제대로 안 할래?"
이와이즈미가 그를 흘끔 쳐다보더니 목소리를 죽이고 오이카와에게 성질을 냈다. 걸레에 물을 묻히는 둥 마는 둥 하고 깨작깨작 서랍 위를 닦던 오이카와는 갑작스러운 소리에 흠칫 놀라더니 상대를 확인하자 징징거리며 그에게 달려들었다.
“이와쨩, 이것 좀 도와줘어.” 이와쨩이라고 불린 이와이즈미 하지메는 그를 밀어내며 인상을 팍 찌푸렸다.
“어디다가 징징거리는 거야? 그리고 왜 네 일을 내가 도와줘!"
“와아, 인상 쓰니까 진짜 못생겼다. 그러니까 여자 친구가 안 생기지."
“너 진짜..." 뭐라고 덧붙이려던 이와이즈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런 식으로 넘어간 게 어디 한두 번이겠냐 만은. 유독 오이카와가 걸레질을 하기 싫어한다는 걸 그도 잘 알고 있었다. “대신 다음 방 청소 때 나 대신 방 정리하는 거나 도와.” 그렇게 합의를 본 오이카와는 행여 그가 말을 물릴까 잽싸게 부엌으로 뛰어갔다. 부엌 안은 분주하게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시종들로 가득했다. 오이카와도 언제나 그랬듯 그 사이에 끼어 일을 도왔다. 여기저기에선 흐뭇한 얼굴로 간을 봐달라며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으며, 그때마다 오이카와는 생글생글 웃으며 쪼르르 달려갔다. 요리를 마치자 식사 시중을 드는 시종들이 식당으로 나가고 나머지는 뒷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이카와는 홀로 나와 숙소로 걸음을 옮겼다.
“저 형은 식사시중 안 들어요?" 갓 들어온 아이가 입을 삐죽이며 묻자 아이의 옆에 서 있던 중년의 시종이 조용히 아이의 입에 손을 갖다 댔다. 가만 주변을 살피고 손을 뗀 여자가 목소리를 낮췄다.
“너 절대로 나가서 그런 소리 하지 말아라. 쟤는 눈에 안 띄는 게 도와주는 거야. 특히 둘째 마님이 보시기라도 하면..." 여자가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사색이 된 시종 하나가 부엌으로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두...둘째 마님이 오이카와를 찾으십니다...! 다른 일을 하고 있다고 말씀드려도 완강하셔서..." 부엌이 일순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시종 중 하나가 오이카와를 부르러 가자 쯧쯧거리는 소리와 오늘 일은 다 했네 라는 한탄, 그리고 걱정 어린 불안한 표정들이 공간을 가득 메꾸었다.
숙소로 돌아가던 길에 붙들려 다시 돌아온 오이카와는 한껏 밝은 표정을 지었지만 속으로는 한숨을 내쉬었다. 위로라도 받고 싶어 이와이즈미를 찾아 눈을 굴렸지만 다른 일이 있는지 부엌에도, 바깥에도 있지 않았다. 식당으로 들어가자 주인어른은 없고 첫째 부인과 둘째 부인, 셋째 부인과 그녀의 자식들만 앉아있었다. 오이카와는 웃는 낯으로 둘째부인의 옆에 섰다.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일손이 부족해 보이길래 불렀다. 너,” 둘째부인이 원래 그녀의 시중을 들던 하인에게 손짓했다, “넌 주방일이나 도와.” 시종은 차고 넘치는데 굳이 오이카와를 지목해 불러온 것은 명백한 억지였다. 하지만 이게 한두 번 있던 일이겠는가. 하인이 오이카와를 향해 동정어린 눈빛을 보냈지만, 일개 하인이 뭘 어쩌겠는가. 고개를 숙이고 돌아갈 수밖에. 오이카와는 능숙하게 그녀 앞으로 식기와 음식이 든 접시를 날랐다. 식탁에는 긴장이 잔뜩 감돌았다. 첫째부인과 셋째부인은 둘째부인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고 셋째 부인의 자식들 역시 자리를 뜨고 싶어 하는 표정을 지었다. 접시와 물 잔의 달그락거림이 유독 크게 울렸다. 작게 오가던 대화엔 팽팽한 긴장이 실렸고 드문드문 침 삼키는 소리가 크게 들려왔으며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것 마저 어색해졌다. 셋째 부인의 딸이 실수로 접시를 큰소리가 나게 내려놓자 둘째 부인을 제외한 모두가 펄쩍 뛸 정도였으니. 부엌의 모두가 숨을 죽이던 찰나, 둘째부인이 잔속의 물을 비웠고, 오이카와가 물 항아리를 기울여 물을 따랐다. 한 절반정도 채웠을까, 그녀가 갑작스레 물 잔을 휙 빼버렸다. 미처 완벽하게 멈추지 못해 결국 식탁위에 물이 조금 쏟아졌다. 정적. 숨 막힐 정도의 정적이 무겁게 식탁 주변의 모든 이들을 짓눌렀다.
“물 하나 제대로 못 따르니?” 날카로운 목소리가 정적을 찢었다. 그럼에도 모두가 딱딱하게 굳어 움직일 줄을 몰랐다.
-아하하, 멍청해라.
“제 어미를 닮아 제대로 하는 일이 없어.”
“죄송합니다. 금방 치우겠습니다.” 모욕적인 언사에도 오로지 오이카와 만이 고개를 숙이고 정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능숙하게 닦을 천을 가져온 오이카와는 그녀의 손과 팔목에 묻은 물을 닦아내려 손을 내렸고, 천을 사이에 둔 그의 손이 그녀의 손목에 닿는 순간, 무언가가 그의 얼굴을 향해 날아왔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틀어 아슬아슬하게 물체를 피한 오이카와는 그것이 벽에 부딪혀 쨍그랑하는 소리를 내며 깨지고서야 물 잔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뒤이어 짜악-, 하는 강력한 마찰음이 찢어진 적막 사이로 지나갔다. 동시에 오이카와의 얼굴이 옆으로 휙 돌아갔다.
“감히 어디에 그 더러운 손을 대!”
-맞아! 더러운 네깟 게!
“...죄송합니다.”
뺨은 얼얼하다 못해 화끈거렸고, 입속엔 비릿한 쇠 맛이 맴돌았다. 그럼에도 오이카와는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떨리는 손을 감추려 주먹을 꽉 쥔 오이카와는 차분히 식탁을 마저 닦고 깨진 물 잔의 파편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보통 사람이 있을 땐 이쯤으로 끝냈는데, 오늘따라 분이 덜 풀렸는지 씩씩거리는 숨소리가 들렸다. 직감적으로 등줄기에 소름이 돋은 오이카와가 뒤를 흘끗 돌아보자 그녀의 발이 날아오는 것을 발견했다. 발견했지만, 그의 앞엔 유리파편이 가득했고, 왼쪽에도 덜 치운 유리조각이, 오른쪽에는 벽이 있었다. 어차피 피해 봤자 더 큰 일로 번질 게 뻔했기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내 식사도 준비해.”
중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오이카와를 향한 발길질이 닿기 직전에 멈추었다. 흘깃 올려다보니 둘째부인의 험상궂은 얼굴은 싹 사라지고 환한 웃음으로 바뀌어있었다. 그녀가 살갑게 목소리의 주인에게 말을 거는 동안 하인 하나가 조용히 오이카와의 쪽으로 다가가 어서 가보라고 손짓했고, 오이카와는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었다. 부엌으로 들어가자마자 그의 주변으로 시종들이 몰려들었으나 오이카와는 생긋 웃으며 괜찮다고 손을 흔들었다.
숙소로 돌아간 오이카와는 입안에 고여 있던 피를 뱉고 수건에 냉수를 적셔 뺨에 대었다. 벌써 부어오르기 시작했는지 화끈거리며 징징 울렸다. 운 좋게 멍이 들지 않기만을 바랄 수밖에. 아까 식당에서 굳이 목소리의 주인을 쳐다보지 않아도 오이카와는 그게 누군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우시지마 와카토시, 둘째 도련님. 정말 싫지만, 세상에서 두 번째로 싫은 사람이지만, 이럴 땐 그의 눈치 없음에 감사하곤 했다.
“그렇다고 우시와카쨩한테 감사하단 소린 아니고.”
제가 한 말을 다시 확인하려는 듯 오이카와가 일부러 입 밖에 내어 말했다.
02.
사막의 밤
그 일이 있은 이후 둘째부인은 잠잠해지는 듯했다. 오이카와를 불러 괴롭힐 시간이 없던 것도 한몫했지만 말이다. 식솔들에겐 비밀로 했지만 그녀는 어떤 일을 바쁘게 준비하는 것 같았다. 오이카와는 아직도 그를 걱정하는 이들에게 “한동안 숨통이 트이겠죠.” 라는 말을 하며 안심시켰다. 방 청소 날이 다가오자 이전에 이와이즈미와 역할을 바꿨던 오이카와는 웃으며 시녀장에게 향했다. 이와쨩 대신 왔어요! 눈웃음을 지으며 말한 그의 얼굴은 곧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그럼 오이카와는 둘째 도련님의 방을 맡아. 요즘 더 크시려는 건지 물도 많이 마시고 요깃거리도 많이 드시니까 다 넉넉히 채워둬. 자기 물건 건드리면 크게 성내시니까 조심하고.”
둘째 도련님이라는 소리에 오이카와는 세상이 무너진 얼굴을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걸레질이나 할 걸 그랬나 봐, 하필이면 그 자식의 방 청소라니. 다른 방은 안 되냐며 사정했지만 다 사람이 가 있어서 안 된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하는 수 없이 부엌에서 물과 음식을 가져온 오이카와는 청소도구를 옆구리에 낀 채 우시지마 와카토시의 방으로 향했다. 그 자식이랑 얼굴 마주치는 건 싫으니까 최대한 빨리 끝내고 나오자. 또 무슨 황당한 일을 시킬지도 모르고. 그리 생각하며 오이카와가 살살 문을 열고 그의 방에 들어갔다.
인기척이 없어서 아무도 없을 거란 그의 기대는 보기 좋게 무너졌다. 환한 햇빛이 방을 가득 밝혔고, 침대 위엔 우시지마 와카토시가 누워있었다. 그나마 낮잠을 자고 있다는 게 마음의 위안이 되었다. 탁자 위에 물 항아리와 음식을 올려놓은 오이카와는 조용히 청소를 시작했다. 분명 대충 끝내려고 했건만, 방이 커서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무슨 방을 이렇게 어질러 놓았는지, 여기저기에 떨어진 쓰레기를 치우며 오이카와는 애꿎은 옷더미에 발길질 했다. 정말 방을 치우는 데에만 한나절이 걸릴 것 같았다. 침대 밑도 분명 지저분하겠지, 그리 생각한 오이카와가 침대 밑으로 손을 뻗자, 누군가가 그의 팔을 덥석 잡았다.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든 오이카와는 우시지마와 정면으로 눈을 마주쳤다.
“무....뭐뭐뭐뭐하는 짓이야!”
“너야말로 뭐하는 짓이냐.”
“보면 몰라? 청소하고 있잖아!”
빽빽거리는 오이카와의 목소리가 시끄러웠는지 우시지마가 다른 손으로 베개를 집어 제 귀를 틀어막았다. 아차, 너무 큰 소리를 내면 안 되지. 그걸 자각한 오이카와도 재빨리 제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목소리를 죽인 오이카와가 다시 소곤소곤 화를 내었다.
“아무튼, 손 놔. 마저 청소해야 돼.”
“...거긴 안 된다. 다른 곳이나 치워라.”
우시지마가 꿋꿋이 손을 놓지 않고 답했다. 청소할 구역이 줄어드는 것은 좋지만 그의 모든 말, 모든 표정이 항상 제 속을 뒤집어 놓았다. 볼 때마다 느껴지는 묘하게 불편한 느낌도 한몫했다. 그냥 알겠다고 하고 나가면 될 것을, 우시지마가 안된다고 버티자 오이카와의 안에서 오기가 발동했다.
“싫다면? 우시와카쨩 때문에 제대로 안 치웠다고 내가 혼나면 어쩌려고!”
“그렇게 부르지 마라.”
우시와카라는 호칭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우시지마가 미간을 찌푸렸다. 시녀 장에겐 내가 말해 놓겠다. 우시지마가 덧붙이자 오이카와는 완전히 할 말을 잃었다. 그런데 잠깐만, 뭐 때문에 이렇게 완강하게 구는 거지? 오이카와의 입꼬리가 씨이익 말려 올라갔다.
“보면 안 되는 거라도 숨겨 놓았나 봐?”
움찔. 정곡을 찔렀는지 굳은 표정의 우시지마가 살짝 움직였다. 뭐야, 정말이야? 야한 책이라도 숨겨 놨나 봐? 맞지?
“아니다.”
아까보다는 표정이 누그러졌지만, 여전히 얼굴이 굳어있는 것은 그대로였다. 어쨌든 지금 보여줄 수 없는 거다. 완고하게 말하는 우시지마에게 더는 반박할 말이 없자 결국 오이카와가 양손을 들었다.
“좋아, 알았으니까 나중에 내가 혼나는 일 없게 해."
“알았다."
어휴, 저 화상. 오이카와는 속으로 욕설을 삼켰다. 빨리 끝났으니까 그냥 무시하자. 성질을 꾹꾹 누르며 방문으로 향하려던 찰나, 다급한 발소리와 함께 문이 벌컥 열렸다.
“망할카와, 어디 있던 거야! 빨리 이리 와.”
“이와쨩, 무슨 일 있어?”
꽤 오래 찾아다녔는지 이와이즈미는 거친 숨을 내쉬며 제 얼굴에 맺힌 땀을 닦았다. 얼굴이 붉게 물든 꼴을 보니 어지간히 뛰어다녔나보다. 너 이럴 때가 아니야, 어서. 잠깐, 잠깐만! 이와이즈미는 항변하는 오이카와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영문도 모른 채 방 밖으로 끌려 나가려던 순간이었다.
“어머니인가?"
우시지마의 낮은 목소리가 들리자 이와이즈미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오이카와는 여기 두고 가라."
“하지만..."
“너도 여기가 제일 안전하다는 걸 알고 있지 않나."
뭐? 오이카와는 우시지마를 빤히 쳐다봤다. 우시지마가 왜 그가 굳이 나서서 저를 돕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잠깐의 변덕? 둘째부인에게 저를 넘길 셈인가? 오이카와가 순식간에 여러 가설을 내는 동안 이와이즈미가 입을 꾹 닫고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럼, 부탁드립니다."
오이카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두 사람을 번갈아가며 쳐다봤다. 설마 이와이즈미가 우시지마의 말을 일말의 의심도 없이 담담하게 받아들일 줄이야. “잠깐, 이와쨩?!” 뒤돌아 나가는 그를 불렀지만 이와이즈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갔다. 그리고 정확히 문이 닫힌 순간,
“마님."
“청소는 잘 끝냈니? 들어갈 테니 문을 열어라."
밖에서 나는 소리에 오이카와와 우시지마가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문 바로 밖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그 누구의 것도 아닌, 둘째 부인의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도련님께서 지금 주무시는 중입니다.”
이와이즈미가 둘러대는 동안 우시지마가 잽싸가 방을 둘러보았다. 이내 무엇을 곰곰이 생각하더니 한숨을 내쉬고는 침대 옆, 벽장의 문을 열었다.
“...들어가라."
오이카와가 창백한 안색으로 고개를 저었다. 옷장으로 쓰는 용이라 안은 상당히 넓었지만 그래도, 저런 곳에. 그의 짧은 저항은 오래가지 못했다.
“지금 시간이 몇 시인데 아직까지 자? 괜찮으니 문 열거라."
오이카와의 대답을 기다릴 것도 없이 우시지마가 그를 벽장 속에 밀어 넣었다. 오이카와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고 괜찮다, 라고 중얼거리곤 조용히 벽장문을 닫았다. 그리고 저는 도로 침대에. 몇 초 차이로 문이 열리고, 둘째 부인이 들어왔다. 벽장 문 사이로 얇게 빛이 들어왔다. 오이카와는 그 틈으로 밖을 내다보며 양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달달 떠는 숨소리가 언제 빠져나갈지 모를 까닭이었다.
-우와, 또 갇혔네?
오이카와가 흠칫 몸을 떨었다. 하지만 들려오는 소리에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대신 손톱으로 제 손을 꾹 누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러자 목소리가 깔깔 웃어대었다.
-우리가 처음 만난 곳이랑 비슷하잖아?
오이카와가 바깥 상황에 집중하지 못하는 동안 우시지마는 잠에서 깬 척을 한 것 같았다. 몇 마디 말을 주고받자 둘째 부인의 목소리가 사근사근하게 풀어졌다. 간간히 들리는 대화는 어째 우시지마를 회유하는 것 같았지만.
“...그 일은 됐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게 무슨 소리니. 너도 나이가 몇인데..."
-으응?
오이카와가 다시 목소리에 흠칫 몸을 떨었다. 천 조각에 몸을 살짝 부딪쳤는데 다행히 소리가 나진 않았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느꼈는지 오이카와는 몸을 뒤로 기울여 벽에 몸을 기대었다. 입에서 당장이라도 소리가 튀어나올 것 같았다. 어둠과 사방의 벽이 목을 졸랐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그저 경련하듯 떨리는 몸을 놔두고 머릿속으로 되뇌었다.
-왜 계속 나 무시해? 대답 좀 해봐!
‘...려주세요...살려주세요...'
-아이 참. 누가 그런 거 물어봤어? 계속 그러면 소리 낸다?
‘...살려...아...아니...그러지...그러지 마,'
-쟤는 어떻게 믿어? 그 아줌마 아들이잖아! 또 몇날 며칠 동안..
‘그만!'
오이카와가 제 무릎에 고개를 묻었다. 듣지 않을 거야, 제발 그만해. 고개를 저으며 들리는 소리에 저항했다. 그런다고 들리지 않는 건 아니지만.
-...문만 박박 긁어대고...
오이카와가 고개를 더 거세게 저었다.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자기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는 더 이상 정신에 들어오지 않았다. 투둑. 고개를 젓다가 팔꿈치를 어딘가에 찧어 가죽 주머니가 떨어졌다. 떨어진 주머니에서 육포 몇 점이 튀어나와 바닥에 나뒹굴었다. 왜 육포가 벽장 속에 있는가에 대한 의문 따위는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공기가 딱딱한 덩어리로 변해 목구멍에 턱, 걸린 것 같았다.
“무슨 소리 나지 않았니?"
오이카와가 돌처럼 굳었다. 여기서 발각되면, 여기서 발각 되면, 여기서 발각되면. 언제부터 났는지 눈물이 얼굴을 타고 흘렀다. 손은 자신의 침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고 목에서는 당장이라도 소리가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의자가 움직이는 소리가 나더니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한 걸음, 두 걸음. 걸음이 향하는 곳은 분명 벽장 쪽이었다.
“...소리가 어디서 난다고 그러세요."
“혹시 모르잖니. 어디에 쥐새끼 같은 놈이라도 숨어들었을지."
멈췄던 발자국 소리가 다시 오이카와의 쪽으로 향했다. 흔들리는 눈동자.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 커다란 한숨. 안 그래도 헐떡이는 바람에 공기가 부족했던 오이카와는 이제 숨조차 쉬지 못했다.
“이상한 걸로 트집 잡으시려는 거 다 압니다. 알겠습니다. 하면 되지 않습니까. 하면."
“정말? 네가 드디어 정신을 차렸구나. 그럼 내일 아침으로 약속 잡으마. 절대 늦는 일 없도록 하고."
반색과 동시에 발걸음의 방향이 틀어졌다. 커다랗게 뜬 눈은 너무 오래 떴는지 경련하듯 떨렸다. 그럼에도 눈꺼풀 움직이는 소리마저 들릴세라 쉬이 감질 못했다.
“알겠습니다. 이만 쉬고 싶습니다."
“그러렴. 내일은 중요한 날일 테니까."
문이 열리는 소리, 뒤이어 가볍게 닫히는 소리가 났다. 점점 발자국 소리가 희미해져, 이내 사라졌다. 뒤이어 다급한 걸음소리가 들리더니 벽장문이 활짝 열렸다.
“오이카와, 괜찮나!"
어둠 사이를 뚫고 나타난 것은 터져 나오는 빛과 사람의 그림자였다. 숨을 못 쉰 바람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커다란 손이 오이카와의 머리를 향하자 오이카와가 다시 흠칫 떨며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거나 말거나 상대는 아직도 입을 틀어막고 있는 오이카와의 손을 부드럽게 떼어내고 눈물을 닦아주었다. 하아, 하아. 그제서야 오이카와는 막혔던 숨을 쉬기 시작했다. 커다란 손이 그를 어두운 벽장 속에서 끌어내었다. 뒤이어 누군가가 저를 끌어안았다. 수만 가지 생각이 들었고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이카와는 그저 그 주인모를 온기에 고개를 파묻고 떨리는 숨을 내뱉었다. 무언가 헛소리도 했던 것 같은데, 아무런 자각이 들지 않았다. 차분한 낮은 목소리가 그를 진정시키며 말을 했지만 그 내용은 머리에 입력되지 않았다.
-이번에는 운이 좋았나보네!
오이카와는 대꾸도 하지 못한 채 계속 헐떡거렸다. 그러기엔 당장이라도 벽장 속의 어둠이 팔을 뻗어 제 숨을 막을 것 같았고 그는 너무 지쳐있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그러고 있었을까, 저를 안심시키던 낮은 목소리가 제 이름을 불러왔다.
“오이카와.”
우시와카? 찬물이 끼얹어진 듯 오이카와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몸을 홱 떼어내 상대를 확인하자, 역시. 여태까지 안겨있던 상대는 우시지마 와카토시였다.
“이제 괜찮나?”
“...으...으응.”
이런 미친. 오이카와는 재빨리 뒷걸음질 쳤다. 우시지마는 별 다른 저항 없이 손을 떼어내었다.
“그... 오이카와씨는 이만 돌아가 볼게!”
“오이카와,”
“그럼 이만!”
오이카와는 저를 부르는 우시지마의 목소리를 모른 체 하고 재빨리 문을 열어 밖으로 튀어나갔다. 미친 거 아니야? 왜? 왜 하필이면 저 자식 앞에서 그런 꼴을? 작은 자신의 거처로 돌아가는 동안 이를 으득 문 오이카와의 의문엔 아무런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카와...”
잠든 오이카와의 눈이 번쩍 뜨였다. 갑작스런 소리에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나 몸을 뒤로 뺐다. 그리고 눈앞에 서있는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너무 놀라서 떡 벌어진 입에선 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처음 든 생각은 살의가 느껴지지 않았으니 누군가의 악질적인 장난이 아닐까 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 주인공은 우시지마였다. 뭐야? 도대체 왜 우시와카쨩이?
“쉿.”
우시지마가 가만 제 입에 손가락을 가져다대고 밖으로 나오라는 신호를 했다. 잠든 척이라도 했으면 좋으련만, 그럴 수도 없게 된 노릇이다. 그래도 무시할까, 잠시 그렇게 생각했지만 계속 버티고 서있는 우시지마가 혹시 다른 이들을 깨울까 싶어 오이카와는 순순히 따라 나올 수밖에 없었다. 밖은 어두컴컴했다. 등불도 다 꺼져 빛을 내는 것은 창백한 달과 흩뿌려진 듯 빛나는 별들이 전부였다. 모두가 잠들었을, 그런 시간.
“한밤중에 무슨 짓이야? 우시와카쨩은 시간개념이 없어요?”
“이런 시간이니 찾아온 거다.”
그건 또 무슨 소리람. 오이카와가 기가 찬 표정으로 그를 쏘아보자 우시지마가 따라오라며 그를 이끌었다. 우시지마가 향한 곳엔 어두워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낙타 두 마리가 있었고, 우시지마는 그 중 가까이 있는 낙타 하나를 오이카와 쪽으로 끌고 왔다.
“타라.”
“뭐어어?”
너 아직 잠 덜 깼냐? 오이카와가 코웃음을 치며 물어도 우시지마는 계속 타라며 재촉했다.
“싫어. 갑자기 무슨 헛소리...으악!”
꿋꿋하게 싫다고 주장하던 오이카와의 외침은 외마디 비명으로 끝이 났다. 우시지마가 오이카와를 들쳐 매고 낙타에 가뿐히 오른 것이다. 당장 내려놔! 그렇게 버둥거렸지만 우시지마는 묵묵히 출발했다. 끈이 연결 된 건지, 뒤에서 다른 낙타도 따라왔다.
“이거, 이거 놔!”
차마 우시지마가 저를 떨어뜨릴까봐 몸부림치지도, 소리도 지르지 못한 채 오이카와가 숨을 죽이고 화를 내었다. 당연하게도 우시지마의 귀에는 전혀 들어오지 않은 듯 했다. 나직하게 시끄럽다, 라는 대답이 돌아올 뿐. 점점 제가 살아온 곳이 멀어지면서 오이카와는 갈수록 이것이 현실이라는 게 믿어지지가 않았다. 언제나 떠나기를 간절히 빌었으면서 결국 갈 곳 없어 떠나지 못했던 곳. 제 모든 원망과 저주가 뒤덮인 곳. 우시지마가 집에서 어느 정도 떨어지자 오이카와를 제 앞에 바로 앉혔다.
“그래서, 무슨 속셈인데?”
“보다시피 집을 떠나는 중이다. 다른 도시로 갈 거다.”
“가출? 그거 그냥 가출이잖아! 미쳤어? 왜?”
“혼인하라 길래 도망치기로 했다.”
“이 철부지 도련님아!”
오이카와가 빼액 소리를 질렀다. 우시지마는 살짝 눈썹을 찌푸렸지만 별다른 항변을 하지 않았고 오이카와는 속이 터질 지경이었다. 혼인 때문에 도마아아앙? 이게 무슨 속편한 소리인가. 그렇다고 무슨 대책이...있을 리가 없지. 오밤중에 사람을 깨워다가 납치하는 꼴이 도무지 계획 따위 잡지 않은 듯 했다. 그러면서 저 태평한 얼굴로 도망 같은 소리나 하고 있는 꼴이란!
“그럼 나는 왜 데려온 건데?”
“정말 왜인지 모르는 건가?”
오이카와가 잠시 생각을 했다.
“도망쳐서도 몸종이 필요하다는 거야?”
우시지마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저기요, 한숨은 이쪽이 쉬고 싶거든요? 오이카와가 속으로 억울하게 외쳤지만 전해질리 없었다.
“내가 집에서 없어지면, 남게 된 상속자는 형님 밖에 없다. 그리고 형님은 너도 알다시피 몸이 약하지. 그렇다면, 오이카와, 너에게 상속권이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소리다.”
가만히 듣던 오이카와가 헛웃음을 지었다.
“우시와카쨩, 나에게 상속권이 돌아갈리 없다는 건 너도 잘 알고 있지 않아?”
“안다. 하지만 우리 어머니도 그렇게 생각할까?”
오이카와의 웃음이 그대로 멈추었다. 확실히, 그렇게 되면 둘째부인은 언제 그를 죽여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오이카와는 대답을 하지 않고 가만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몇 시간이 지나고 뒤를 돌아보자 점점 멀어지던 커다란 저택은 이윽고 점이 되었다.
언제 잠든 건지 오이카와가 눈을 비비며 정신을 차리자 깊었던 하늘의 색이 점차 밝은 색을 띄기 시작했다. 도시는 까마득한 어젯밤에 벗어났다.
“곧 해가 뜨면 우리가 사라졌다는 사실이 발각 될 텐데...발자국도 다 남아있고. 너희 집에서 사람을 안 보낼 리도 없잖아. 얼마 안가 잡힐 거라는 생각은 안 해봤어?”
“아, 그럴 리는 없다.”
우시지마가 단정적으로 대답했다. 좋아, 적어도 굶어죽지 않게 최소한의 계획은 짜놨던 거군. 오이카와가 안도하는 표정으로 우시지마를 돌아봤다.
“보기보다 멍청이가 아니라서 다행이네. 어떻게 할 건데?”
“나흘이 걸리는 여정인데 그 정도 계획도 없을 거라 생각했나. 우리는 먼저 출발했다. 설마 내가 집을 떠났을 거라고 생각하는 이도 없을 테니 도시를 벗어났다는 걸 발견하려면 꽤 걸릴 거다. 결국 오늘 저녁엔 다시 돌아갈 수밖에 없을 거다. 왜냐하면...”
응응. 오이카와가 집중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모래폭풍이 오기 때문이다.”
“아, 그렇구나.”
해맑게 대답한 오이카와는 우시지마의 말에 아무 생각 없이 대꾸를 하다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뭐가...온다고...?
“잠깐, 잠깐만. 모래...폭풍...?”
“그렇다.”
“뭐어어어어어?”
03.
모래폭풍
“당장 내려줘! 이런데서 개죽음 당할 수는 없어!”
“위험하니 움직이지 마라."
오이카와가 있는 힘껏 발버둥을 치자 우시지마가 그의 어깨를 내리누르듯이 잡았다. 한참을 실랑이를 벌이더니 결국 오이카와가 제풀에 지쳐 조용해졌다. 원래는 더 일찍 바꾸려고 한 것 같았지만, 우시지마가 잠잠해진 오이카와를 뒤에서 짐을 싣고 따라오던 낙타로 옮겨 태웠다. 오이카와가 낙타를 앞세워 우시지마 옆에 섰다.
“그래서, 모래폭풍에서 같이 죽자는 소리야?"
우시지마가 고개를 저었다.
“그게 무슨 소리냐. 아무도 죽지 않는다.”
우시지마의 당당한 얼굴에 오이카와는 뒷목이라도 잡고 쓰러질 것만 같았다. 싫어하는 새끼랑 사막 한복판에 떨어진 것만 해도 속이 쓰려 죽을 것 같은데...저승길 길동무까지 되어주라고? 짧고 험난한 인생치고 그 끝마저 너무했다.
“미리 알아둔 곳이 있다.”
“예, 예, 그러시겠죠.”
그의 말은 귓등으로 흘려 넘기며 오이카와가 손을 휘저었다. 주변은 황량한 사막 그 자체. 작열하는 태양 밑엔 그늘 하나 없었고 주변엔 온통 모래 언덕뿐이었다. 여기서 얼마나 앞으로 가도 뭐가 나올 것 같진 않았다. 그 말인즉슨, 오이카와 토오루가 도망칠 곳도 없다는 소리였다. 남은 대안이라고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우시지마를 믿는 수밖에. 모든 가능성이 좁혀지자 결국 오이카와는 체념하며 물었다.
“그래서...그게 어딘데?”
“상인들이 묵는 곳이다. 해가 지면 아슬아슬하게 도착해 있을 거다.”
“아슬아슬? 모래폭풍이 온다는데 참 남의 일처럼 속편하게 말한다.”
비꼬는 말이 툭 튀어나왔다. 그래, 죽게 생긴 마당에 이 오이카와씨도 더는 도련님이라고 안 봐준다 이거야. 언제는 그런 걸 신경이라도 쓴 적이 있었냐마는. 오이카와가 그러거나 말거나 우시지마는 일말의 반응도 없이 묵묵히 낙타를 몰았다.
“그리고, 나를 데려간 이유도 그래. 네가 언제는 내가 어떻게 되건 신경이라도 쓴 적 있어?”
말이 나오자마자 오이카와는 입을 꾹 다물었다. 당장 어제의 일이 떠올랐으니까. 저가 한 말을 주워 담아 ‘언제는’ 이라는 부분을 빼고 싶었다. 날선 말에 조금은 미안하기도 했고.
-그래, 어제 한 번은 있었지. 그래서 뭐?
‘응, 그렇네.’
오이카와는 빠르게 수긍했다. 맞아, 겨우 그 정도로 우시와카한테 미안해? 내가? 단 한 번의 도움으로 오랜 세월 쌓여온 감정의 골을 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무엇보다 저를 데려온 이유가 단순히 제 목숨이 위험해서 그렇다고 믿기엔 미심쩍은 구석이 많았다. 오이카와가 우시지마에게 골탕 먹은 것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니. 세상에서 두 번째로 싫어하는 이유로는 그게 제일 컸다.
-정말?
‘맞아. 그게 전부야.’
-웃기네. 추악하기는.
오이카와가 눈을 부릅떠도 깔깔대며 웃었다. 웃음소리가 조용해지고 나서도 계속 제 머리에 소리가 맴돌았다.
‘추악하기는, 추악하기는, 추악하기는... ’
“있다.”
낮은 목소리가 끝없는 목소리의 연쇄를 끝냈다. 오이카와는 저가 눈을 크게 뜨고 주먹을 꾹 쥐고 있었다는 사실도 그때서야 깨달았다. 잡음이 사라지자 숨을 내뱉으며 주먹을 풀어냈다. 이마에 맺힌 식은땀도 쓸었다. 그 목소리가 지닌 뜻이 머릿속에 입력되자 제일 먼저 나온 것은 비웃음이었지만.
“퍽이나.”
모래가 붉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중간에 몇 번 멈춰 밥-아마 전날 저녁을 몰래 꿍쳐온 것-을 먹고 물을 마시긴 했지만, 딱 그 정도 수준의 말 몇 마디만이 오갔다. 곧 있으면 밤이 찾아올 텐데 우시지마는 여전히 목석같은 얼굴로 앞만 보고 있었다. 초조해하는 기색이나 걱정하는 안색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결국 그렇게 해가 거의 저물어갔다. 그 동안 뭐가 보였냐고? 아무것도. 망망대해를 이룬 모래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오이카와는 초조하게 침을 삼켰다. 우시지마에게 말을 걸긴 싫었지만 계속 목이 타는 것을 어떡하나. 모래 언덕 하나를 눈앞에 두고 우시지마가 고삐를 당겼다.
“내려라.”
오이카와가 멍한 얼굴로 우시지마의 쪽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우시지마는 그새 낙타에서 내려 보이지 않았다. 오이카와가 꾸물거리다 내리자 우시지마가 그에게 무언가를 건넸다. 옷 꾸러미였다. 설명을 요구하는 표정으로 올려다보자 우시지마가 갈아입으라는 손짓을 했다. 오이카와가 옷을 펼쳐보자,
“저기, 우시와카쨩? 옷 잘못가져오셨네요.”
오이카와가 펼쳐 보인 것은 여성용 옷이었다. 잔뜩 비웃는 목소리로 말해주었지만 우시지마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오히려 알고 있다는 분위기를 풍기는 듯했다. 그리고 예측은 빗나가지 않았다.
“제대로 가져온 것 맞다만.”
“나보고 여자 옷을 입으라고?”
“그렇다.”
도대체 이건 무슨 상황인가. 오이카와는 황당하게 그를 빤히 쳐다봤다.
“저기, 우시와카쨩, 오이카와씨는 남자거든요?”
“알고 있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시간 없으니 어서 갈아입어라. 다 입으면 이것도.”
우시지마가 꺼내든 것은 오이카와의 머리색과 똑같은 색의 긴 머리 가발이었다. 오이카와가 세상에서 제일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나보고 지금 여장을 하라고?”
우시지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사람이 이런 어처구니없는 말을 당당하게 하는 건지.
“너 진짜 미쳤지? 내가 왜?”
“네가 하는 게 내가 하는 것보다 낫기 때문이다.”
이 정신 나간 도련님은 또 무슨 소리야? 오이카와가 무슨 얼굴을 하던, 어떤 반응을 보이던, 우시지마는 그저 팔짱을 끼고 기다리고 있었다. 들고 있던 옷을 내팽개친 오이카와는 우시지마의 코앞까지 들이대어 삿대질을 했다.
“제대로 무슨 일인지 설명하기 전엔 네 말 한 마디도 안 들을 거야.”
“좋다,”
우시지마가 바닥에 떨어진 옷을 주워들며 한숨을 쉬었다.
“지금 집에서 찾고 있는 것은 남자 둘. 여기도 집에서 그리 먼 곳이 아니니 내일이면 그 소식이 전달 될 거다. 그러니 네가 여장을 하면 시간을 더 끌거나, 운이 좋다면 위치를 교란시킬 수 있다는 거지.”
말문이 턱 막혔다. 그의 말에 반박을 할 수 없다는 게 제일 복장 터지는 부분이었다. 얼굴을 꽁꽁 싸맨 수상한 남자 둘을 발견했다는 정보가 들어가면 잡히는 것은 시간문제. 납득은 갔다. 지금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얼마 없었고, 우시지마의 말이 최선이라는 것도 인정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여장은 안 해.”
“시간이 얼마 없다, 오이카와. 곧 모래폭풍이 닥친다. 네 말대로 이런 곳에서 같이 죽고 싶은 게 아니라면 어서 움직이는 게 좋을 거다.”
아, 인생. 오이카와의 귀에도 불길한 바람소리가 들렸다. 곧 있으면 소리는 더 커질 것이고, 모래폭풍은 이 곳을 덮칠 테지. 신경질적으로 우시지마의 손에서 옷을 뺐어든 오이카와는 그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우시와카쨩, 나한테 제대로 빚 진거야.”
돌로 된 건물의 문이 끼익 하는 소리를 내며 열렸다. 해가 완전히 저물어 캄캄해진 사막에서 유일하게 빛을 내는 곳이었다. 덩치 큰 한 남자와 키가 남자만큼 큰 여자가 들어왔다. 남자는 여느 여행객처럼 터번으로 얼굴을 둘둘 가렸고 여자는 눈만 드러난 베일을 착용하고 있었다. 베일의 너머로 긴 갈색 머리가 흘러내렸다. 남자가 여자를 보호하듯 제 뒤로 보내더니 주인으로 추정되는 이에게 다가갔다.
“오, 운이 좋으시군요. 마침 딱 하나 남은 방이 있답니다.”
여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신혼부부인걸까, 좋을 때군. 주인이 껄껄대며 웃었다. 남자가 값을 치루고 여자를 방으로 이끌었다.
“그나저나, 부인분이 키가 크시군요.”
남자의 표정이 날카로워졌다.
“남의 외모에 대해서 함부로 언급하는 거 아닙니다.”
“아, 이거 실례했습니다. 푹 쉬시죠.”
부부는 고개를 까딱하고 주인이 알려준 방으로 향했다.
“내가 한 번만 더 네 말을 들으면 개다!”
여자가, 아니, 여자로 변장했던 오이카와가 베일과 가발을 집어 던지며 씩씩거렸다. 뭐? 방이 하나? 그럼 이 자식과 같은 방까지 써야하는 게 아닌가. 방은 일인용으로 남자 둘이 쓰기엔 상당히 좁은 공간이었다. 게다가 침대도 하나. 걸친 옷을 벗어내자 속에 갖춰 입은 평상복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내가 여장했으니까 침대는 내가 쓴다? 불만 없지?”
우시지마의 대답이 돌아오기도 전에 오이카와가 털썩, 침대에 큰 대자로 드러누웠다. 고작 하루가 지났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았다. 그러기엔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났고, 낙타 위에도 너무 오래 앉아있었다. 이제 그만 잘 거야. 아직 램프엔 불이 들어와 있었지만 뭐, 그정도야. 무거운 눈을 붙였다. 고단한 하루였지, 그런 생각을 하며 바로 잠에 빠져들 무렵, 침대가 출렁였다. 오이카와가 눈을 활짝 뜨고 고개를 돌리자, 옆에는 우시지마가.
“우시와카쨩, 분명 침대는 내가 쓰겠다고 말했던 것 같은데요?”
잠을 방해받은 오이카와가 이를 갈며 웃어보였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바닥에서 잘 수는 없지 않나.”
그러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 비좁은 침대의 절반을 차지해버렸다. 성이 난 오이카와가 우시지마를 밀어내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저는 어제 눈을 붙였지만 그는 한숨도 자지 못했던가. 고개를 흘끗 들어 곁눈질로 쳐다봤지만 도저히 스스로 내려갈 것 같진 않았다. 그렇다고 오이카와가 바닥으로 가서 눕기엔 바닥은 너무 더러웠고, 고작 우시지마 때문에 푹신한 침대에서 내려오고 싶지도 않았다. 에라, 모르겠다. 오이카와가 우시지마에게 등을 돌린 채로 눈을 감았다. 고른 숨을 내쉬며 깊은 잠에 빠지려던 찰나, 제 위로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우시지마가 오이카와가 잠들었는지 확인하려는 것 같았다. 이내 제 자리로 돌아가더니 가벼운 손길이 오이카와의 머릿결을 쓰다듬었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오이카와의 눈이 반짝 뜨였지만 그의 말을 무시하고 계속 자는 척을 했다.
“오이카와, 자나?”
아무런 미동이 없자, 우시지마가 램프에 붙은 촛불을 불어서 껐다. 그리고 오이카와가 살면서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다정하고 아련한, 금방이라도 귀가 녹아내릴 듯한 저음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랑한다.”
04.
잊혀진 것들
새벽이 채 가시지도 전에 두 인영이 건물에서 빠져나왔다. 낙타에 오른 이들은 다시 끝없는 모래의 산으로 향했다. 깼을 땐 정신이 멀쩡했는데 밤잠을 설친 탓인지 오이카와가 연신 하품을 했다. 아직 새벽이라 공기가 찼다. 우시지마가 꾸벅꾸벅 조는 오이카와에게 제 어깨에 덮여있던 옷을 건넸지만 오이카와는 그것을 손으로 쳐냈다. 아침 해가 적당히 뜨자 낙타를 멈추고 식량을 꺼냈다. 딱딱한 육포 몇 조각과 물. 음식을 씹으며 감기는 눈을 억지로 떴다.
어젯밤, 우시지마의 말에 오이카와는 찬물을 뒤집어쓴 기분이었다. ‘사랑한다.’, 그 말이 가슴언저리에 콱 박혀 사라지질 않았다. 심장을 옭아매는 느낌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장난이나 골탕이라고 치부하기엔 그 말의 무게가 너무 무거웠고, 진심이라기엔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이 너무 많았다. 졸려서 그런 걸까,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고 어딘가 붕 떠 있는 것 같았다.
“오이카와, 이제 출발해야한다.”
“...어? 아, 응.”
멍하니 있던 오이카와는 방금 제가 멍청하게 대답했다는 걸 깨닫고 자신의 머리를 한 대 치고 싶었다. 하필이면 저놈 앞에서. 육포가 담긴 주머니를 정리하고 물주머니를 정리하다가 두 사람의 손끝이 스쳤다. 우시지마는 멀끔하게 나머지 물건을 정리한 반면, 갑자기 오이카와의 귀 끝이 달아올랐다. 잠깐만, 왜 우시와카쨩은 아무 반응 없는 거죠? 정말 어제의 그 사람이 맞는지 의심이 갈 정도로 멀쩡했다. 그래, 그러거나 말거나 무슨 상관이람.
그렇게 다짐한 지 오 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오이카와는 흘끗흘끗 우시지마를 쳐다보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건 다른 시종들이 들려주던 것처럼 없으면 못 살 것처럼 굴고, 애정이 과즙처럼 뚝뚝 흘러넘치는, 그런 게 아니었나? 그에 비해 우시지마는 사랑은커녕, 당장 저가 이곳에서 죽어버려도 눈 하나 깜짝 안 할 것 같았다. 그것도 그럴게, 항상 그러지 않았었나. 툭하면 그를 찾아내어 신선한 물이 마시고 싶다며 우물가로 보내버리고 제가 심하게 앓아누운 날에도 뜬금없이 시장에 과일을 사오라고 보냈다. 혹시 어제 들은 말은 사랑한다가 아니고 살인한다가 아니었을까? 너무 피곤해서 헛것을 들은 건? 온갖 생각이 들었지만 결국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왜냐면, 설사 우시지마가 연모의 감정을 품고 있다고 해도 저는 눈곱만큼도 그걸 받아줄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절대로.
‘아, 여기 쳐다봤다.’
멍하니 있다가 그와 눈이 그대로 마주쳤다. 미미하게 달아오른 귓등과 가볍게 움찔한 입꼬리가 언뜻 보였다. 우시지마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다시 앞으로 돌렸지만, 그의 표정은 뭐라 집어 부르기 미묘해서, 보는 사람마저 간질간질해질 정도였다.
‘저런 표정도 지을 줄 아는구나.’
사춘기 소년 같은 얼굴이었다. 분명 그럴 나이이지만 평소 우시지마가 워낙 목석 같아서 이런 모습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오이카와가 제 입안을 꾹 물었다. 잘못들은 게 아니었네. 무시하려고 했는데 어째서인지 머릿속에서 그 모습이 떠나지를 않았다. 그러고 보니 그가 저런 모습을 보인 게 처음은 아니었을 거라는 생각이 스쳤다. 그런 목소리로 그런 말을 하려면 분명 꽤 오랫동안 품고 있었겠지. 워낙 티가 나질 않아서 그간 알아채지 못한 것이었나.
‘언제부터였을까?’
-그게 무슨 상관인데?
오이카와가 미간을 찌푸렸다.
‘궁금할 수도 있지.’
-더러운 너 같은 게, 엄마를 쏙 빼닮아서 그렇게 남자를 밝히나?
‘그런 거 아니야.’
-모르지. 피는 속일 수 없으니까.
‘저리 가.’
-자존심이 상하셨나 보네.
‘...’
-그 하찮은 자존심 때문에 분명 나중에 후회할걸?
오이카와는 비꼬는 말에 대답하는 대신 낙타에 달린 가죽 주머니에 담긴 물을 들이켰다. 무시하자 더 이상 말이 걸려오지 않았다. 오이카와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따가운 햇볕이 머리에 쓴 하얀 두건을 덮었다. 천천히, 저도 모르게 뜨거운 낮잠에 빠져들었다.
오이카와가 우시지마가에 온 지 이틀째의 일이었나?
“천박한 것."
오이카와는 눈을 껌벅거리며 위를 올려다봤다.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해서는 아니었다. 단지 왜 자신을 그렇게 부르는지 이해를 못 할 뿐이었다.
“어딜 올려다봐?"
짜악. 뺨에 가해진 통증을 인지하기도 전에 오이카와는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눈에는 눈물이 글썽였다. 처음 맞아보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를 짐짝 취급하던 친모조차도 다섯 살짜리가 견딜 수 없을 수준의 체벌을 가한 적은 없었다.
“왜...왜...." 왜 때리는 거예요?라고 물으려고 했다. 그러나 겁에 질린 오이카와는 충격이 가시지 않았는지 말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그 날부터 오이카와는 둘째부인에게 폭력을 당하며 살아왔다.
그로부터 한 열흘 뒤, “오이카와, 창고에 이것 좀 넣고 와.” 누군가가 커다란 양탄자를 넘겼다. 오이카와는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크게 쌓아올려진 양탄자를 들고 낑낑거리며 커다랗고 어두운 창고의 구석에 그것을 내려놓았다. 끼이익, 줄어드는 빛에 고개를 돌리자 낯익은 인영이 문가에 서 있었다. 싸늘하게 내려다보는 둘째부인의 시선은 오이카와의 눈과 잠시 맞닿았지만, 콰앙. 이내 깜깜한 어둠이 빛을 전부 밀어내었다.
“어? 어어?”
오이카와가 어둠 속에서 비틀거리며 문틈 사이의 아주 약한 빛을 향해 달려갔다. 하지만 문은 굳게 잠겨있었다. “문 열어주세요!” 라고 외쳐도, 낑낑거리며 문과 씨름을 해도,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몇 시간 후에 누군가가 올 거야.’ 오이카와가 자기 자신을 안심시켰지만, 밖에서는 인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새카만 어둠은 무서웠다. 당장 어디서 무언가가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살려주세요! 거기 누구 없어요?”
너무 소리를 질러대어 목소리가 갈라졌다. 작고 하얀 두 주먹에는 새빨간 피멍이 들었고 배는 주려왔다. 저녁이 되고 밤이 찾아왔지만 여전히 아무도. 며칠이나 지났는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끝없는 어둠에 잠이 들었다가 깨었고, 목은 완전히 잠겨버려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아, 이대로 여기서 죽겠구나.’ 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목이 너무 말랐다. 배가 너무 고팠다. 그때, 어디선가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정신 차려. 죽지만 마.
“...누구야?”
-나? 난 너야.
“그게 무슨 소리야?”
-멍청하긴. 모르면 마.
그 목소리는 가끔 못된 말을 했지만, 단둘밖에 없어서, 의지할 만한 것이 그 밖에 없어서, 오이카와 토오루는 그저 그것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가끔 기절도 했던 것 같다. 마침내 허기와 갈증에 지쳐 목소리가 하는 이야기조차 들리지 않을 무렵, 마지막으로 소리를 내지른 오이카와는 바닥에 털썩 드러누웠다. 차가운 돌바닥도 이제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 기적처럼 문이 벌컥 열렸다. 누군가가 소리를 질렀다.
“여기 사람이 있어요!”
빛에 가려 제대로 보이진 않았지만 누군가가. 누구지...? 웅성대는 소리를 들으며 오이카와의 정신이 흐릿하게...
“오이카와!”
잠든 사이 무게중심을 잃어 하마타면 바닥으로 떨어질 뻔했다. 오이카와가 벌떡 일어나자 낙타가 놀랐는지 두어 번 콧소리를 냈다. 간신히 안장을 붙잡고 중심을 잡은 오이카와가 놀란 가슴을 쓸었다. 소리를 낸 우시지마 쪽을 돌아보자 그의 하얗게 질려있던 얼굴에 안도감이 돌았다. 왜? 언제부터 네가 나를 신경 썼다고 그런 표정을 하는 거지?
“오늘은 여기서 멈추는 게 좋겠다.”
마침 해질녘이라 우시지마가 낙타에서 내려 오이카와의 낙타가 싣고 있는 천막을 꺼냈다. 그간 아버지를 따라 집을 비웠을 때 어깨너머로 배운 것인지 꽤 능숙하게 천막을 세웠다. 그에 비해 오이카와는 끔찍한 옛 기억을 떠올려서일까. 뱃속에서부터 화가 솟구쳤다. 당장에라도 역정을 낼 것 같은 기분을 꾹 누르고 오이카와의 얼굴에 피식, 비웃음이 떠올랐다. 기분 나빠.
“왜 그런 표정을 지어?”
우시지마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빤히 쳐다보자 오이카와의 안에서 그동안 꾹 눌러놓기만 했던 감정이 폭발했다.
“너 저번에 나한테 무슨 일이 있든 신경 쓴 적이라도 있냐는 말에 있다고 대답했지? 그래서 네가 뭘 했는데? 여태까지 나 죽어가는 꼴 보고 있기만 하고, 아픈데도 부려먹고! 네가 도대체 뭘 했어!”
둘 사이에 한 번도 꺼낸 적 없는 주제가 흘러나왔다. 우시지마는 평소와 같은 표정을 지었지만, 그의 눈에는 당황함이 깃들어있었다. 가볍게 한숨을 내쉰 우시지마는 말없이 앞만 보았다.
“뭐라고 말이라도 해보던가!”
우시지마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오이카와의 분노에 찬 시선을 그대로 받아내었다. 한동안 물끄러미 쳐다보던 우시지마가 예상외의 대답을 했다.
“말하자면 긴 내용이다. 조금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주지 않겠나.”
05.
별의 장막
우시지마가 입을 연 것은 하루가 꼬박 지나서였다. 긴긴 밤중에 천막 앞에 지핀 불을 지키기 위해 교대로 서로를 깨우는 것 말고는 이렇다 할 대화는 오가지 않았다. 화를 내야 할지 말아야할지. 오이카와에게는 화낼 내용이 산더미같이 남아있었는데 우시지마가 할 말이 있다니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불편하고도 어색한 침묵이 계속 흘렀다.
“오이카와,”
오이카와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점심을 마치고 다시 출발했을 즈음, 우시지마가 마침내 대화를 시작한 것이다. 오이카와를 본 우시지마가 찬찬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디서부터 말을 해야 할까 고민 중이었다. 아주 오래된 이야기니까, 기억이 잘 나지 않는 부분도 있었고. 그런 만큼 옛날이야기부터 꺼내는 게 옳을 것 같군. 네가...창고에 갇혔던 그 날부터.”
우시지마가는 원래 왕가와 혈연이 있는 집안이었다. 지리적인 여건이 좋아서인지 그들이 몇 대에 걸쳐 축적해온 부는 엄청났다. 지금은, 왕조차 어쩌지 못할 정도라는 소문까지 돌 정도로. 그렇게 돈이 넘쳐나니 아랫사람들에게 잡일을 맡겨두고 그네들은 중요한 일 몇 가지만 하면 되었다. 그날은 우시지마가의 병약한 첫째 도련님을 제외하고 힘을 쓰는 식솔들까지 동원해 다른 도시로 떠난 날이었다. 중요한 무역 일에 아들도 소개시킬 겸 데려간댔나.
우시지마 와카토시는 오이카와 토오루가 우시지마가에 도착한 날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작은 체구와 곱상한 얼굴의 또래 소년의 존재는 꽤 신기했다. 반면 어머니는 그를 매우 싫어했다. 다른 여자가 겁도 없이 아이를 버리고 가 집안에 먹칠을 했다는 점, 그 얼토당토하지 않은 주장에도 반박하나 없이 아버지가 아이를 거둬들인 점, 그리고 저의 후계자 자리가 흔들릴 수도 있다는 초조함으로 증오에 가까운 감정을 품었던 것 같았다. 오이카와가 저의 어머니에게 ‘어머니’라는 호칭을 쓴 순간, 우시지마는 난생 처음으로 그녀의 눈빛에서 광기를 보았다. “천한 것이 감히 어디다대고!” 그리 말하며 뺨을 내려쳤던가. 말려도 보았지만 전혀 소용이 없었다. 다른 시종들에겐 온화하고 품위를 지키던 어머니는 유독 오이카와의 앞에서만 다른 사람으로 돌변했다. 그때부터 우시지마에겐 오이카와를 눈으로 좇는 일이 잦아졌다. 오이카와가 신경 쓰였다기 보단 제 어머니가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몰라서 그랬다. 그래서 제가 며칠간 떠난 날, 동갑이라곤 해도 그 작은 애가 그렇게 걱정이 되었다. 그렇게 떠나서 닷새 후에 돌아왔더니 어디에도 오이카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오이카와 어디 갔어요?” 아무나 붙잡고 물어보자 그들이 떠났던 날부터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끈덕지게 물어도 돌아온 대답이라곤 “그 어린 게 그렇게 맞다보니 도망이라도 갔나보지.”정도. 그럼 어머니는 특이한 말 없었냐고 다그치듯 묻자 시종 중 하나가 이런 말을 덧붙였다. “그러고 보니 뒷마당 쪽으론 얼씬도 하지 말라고 하셨죠.” 그때 우시지마의 머릿속에 스친 것은 그 작은 창고였다. “창고! 그 창고 열쇠는?” 예상대로 창고 문을 열자, 그 안에는 쓰러진 오이카와가 있었다. 그 이후부터 우시지마는 어머니가 오이카와를 찾으면 안 좋은 일이 일어난다는 것을 학습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오이카와에게 잡일거리를 시켜 어머니가 없는 곳으로 보내버렸다. 시간이 지나고 오이카와가 새로 들어온 이와이즈미라는 아이와 친하게 지낸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우시지마는 오이카와에겐 비밀로 하기로 하고 그와 약속을 했다. 둘째부인이 오이카와에게 무슨 짓을 하면 이와이즈미가 우시지마에게 알려 우시지마가 와서 맥을 끊기도 했고, 체면을 지키라며 말리기도 했다.
“잠깐만, 이와쨩이랑? 언제부터?”
짧고 드문드문 이어지던 우시지마의 과거 이야기를 끊고 오이카와가 불쑥 물었다.
“열두 살이었나.”
“왜 나한텐 비밀로 했던 거야?”
오이카와의 눈이 혼란으로 점칠 되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이야기였으니 그럴 만도 했지만.
“간단하게 말하자면 네가 믿을 것 같지 않아서였다, 그리고 네가 알고 있다는 게 들키면 네가 더 곤란해지기 때문이다.”
이와이즈미를 설득시키는데 꼬박 일 년이 걸렸다고 했다. 주변인한테도 그 정도 시간이 걸렸는데, 당사자가 쉬이 믿어 주거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고.
“곤란해진다는 건 정확히 무슨 소리야?”
“갑자기 너와 내 사이가 가까워지면 누구의 귀에 제일 먼저 들어갈 거라고 생각하나. 조력관계가 밝혀진다고 가정해도 그렇다. 그 이후론 누가 너를 숨겨주지?”
갑작스런 정보에 혼란은 더욱 가중되었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은 믿을 수 있었다. 제 환심을 사기 위해서라는 가능성도 있었지만, 여태까지 의문을 품었던 부분들에 대한 설명이 되었고, 무엇보다 여기까지 와서 거짓을 고한들, 그에게 아무런 이득이 없지 않은가. 머리로는 납득이 갔다. 그러니까, 머리로만. 감정은 새로 주어진 사실을 한없이 부정하고 있었다. 10년이나 넘은 적대감과 감정의 골을 덮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무엇이 부족한지는, 글쎄, 저 자신도 떠올릴 수 없었다. 정보일까, 시간일까, 아니면 그 외의 무언가가.
-그걸 알면 어떻게 할 건데?
숨이 턱 막혔다. 그래, 알고 나면, 그 다음엔 어쩔 것인가? 과연 알 필요가 있는 걸까? 그가 저를 몰래 도왔다고는 하지만, 그게 저가 그를 용서해야 하는 면죄부라도 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여전히 그녀의 아들이었고, 저를 괴롭게 했었다. 이것은 변함없는 사실이었다. 오이카와의 오해가 풀렸다 한들 우시지마를 용서해야 할 의무는 하등 존재하지 않았다.
“그럼 너는 왜 그렇게 하면서까지 나를 도와준 건데?”
오이카와가 넌지시 묻자 우시지마가 그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아차, 이게 물어도 되는 주제였나. 오이카와가 가볍게 제 혀를 깨물었다.
“...글쎄다.”
그럼 그렇지. 괜히 흔들렸다. 언제부터였는지는 몰라도 우시지마가 여태까지 들키지 않게 숨겨왔던 것이다. 그걸 한 순간에 무너뜨릴 정도로 바보는 아닐 테니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해가 저물자 그들이 적당한 곳에 멈춰 섰다. 우시지마가 천막을 세울 동안 오이카와는 낙타들에게 물을 주었다. 천막을 다 세운 우시지마가 불을 피우는 동안 오이카와는 언제나 그래왔듯 쏘옥 안으로 들어갔다. 밖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걸로 봤을 때 아무래도 저녁을 준비하는 것 같았다. 아, 또 그놈의 말린 고기겠지. 식량을 그것만 가져온 건 아닌 것 같던데. 오이카와가 빼꼼히 천막 밖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예상대로 우시지마가 육포를 꺼내고 있었다.
“우시와카쨩, 그거 말고 음식 더 있지?”
“그렇다만.”
“그럼 왜 계속 육포만 먹는 거야?”
“...내가 요리 하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오이카와가 빠득, 이를 갈았다. 그런 이유 때문에 며칠째 같은 것만 먹게 해? 물론 시종생활만 몇 년을 했기에, 까다로운 입맛을 지닌 오이카와라 해도 무엇을 먹든 크게 상관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삼시세끼 같은 것만 먹이는 악취미적인 짓을 당한 적은 없었다.
“그럼 말을 하던가! 우시와카쨩 같은 멍청이는 모르더라도 오이카와씨는 요리할 줄 알거든?”
“그건 나도 알고 있다.”
우시지마가 시선을 피했다. 오이카와가 속이 터질 것 같아 뭐라고 말해야 할지 짧게 고민하는 동안 그가 답지 않게 우물쭈물 하다가 설명을 덧붙였다.
“도망쳐서도 몸종이 필요했냐고 했던 건 오이카와 네가 아닌가.”
“뭐?”
제가 그런 말을 했었던가. 어쩐지 그 맥락이 달랐던 것 같지만, 그걸 아직까지 신경 쓰고 있었다니. 징그럽게 저 큰 덩치로 귀엽게 굴기나 하고. 오이카와가 작게 투덜댔다.
“어차피 난 몸종 맞잖아. 나도 먹는 밥인데 그런 건 그냥 말하라고. 비키세요, 우시와카쨩.”
오이카와가 천막에서 나와 우시지마를 밀어내고 낙타에 매달린 가죽 주머니를 열어 안에 들어있는 것을 확인했다. 가는 도중에 상할 수도 있으니 들어있는 것은 대부분 건조한 식품이었지만 이걸로 스튜정도는 끓일 수 있을 법 했다. 아니, 사실 뭘 먹어도 그 딱딱한 육포보단 낫겠지. 오이카와는 차분히 우시지마가 싣고 온 잡동사니 중에 쓸 만한 것들을 뒤졌다.
“본가에선 그랬다고 해도, 여기선 아니다. 여기서도, 앞으로도, 네가 신분에 구애받는 일은 없을 거다.”
오이카와의 손이 멎었다, 신분에 구애받지 않는 삶. 천하다며 멸시받지 않는 인생. 평생 동경해온 것들. 멈췄던 손을 아무렇지도 않게 움직여 요리를 시작했지만 오이카와는 분명 크게, 아주 크게 흔들렸다.
-그래봤자 네가 천하다는 건 변하지 않아!
‘입 좀 다물어봐.’
-설마 벌써부터 헛된 상상을 하는 건 아니겠지? 넌 절대로 그와 동등해질 수 없어.
‘그 누구도 너처럼 나를 부른 일이 없어질 수도 있어.’
그 이후로도 몇 마디가 들렸지만 오이카와는 묵묵하게 요리를 계속 했다. 평생 저를 옭아매던 사슬에서 해방 될 기회였다. 아무도 저를 모르고 아무도 제 출신을 문제 삼는 일이 없는 미래를 조심스레 그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완성된 스튜는 열악한 재료로 만든 것 치고 나쁘지 않았다. 딴 생각에 잠겨있는 오이카와가 실수로 육포를 조금 넣고 말았지만, 그것도 국물에 풀어져서 꽤 먹을 만 했다. 우시지마가 남아있는 것의 뒷정리를 하는 동안에도 오이카와의 정신은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 있었다. 우시지마가 일을 다 끝내고 제 맞은편에 앉는 것조차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우시지마는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봤다. 마침내 그의 존재를 확인한 오이카와가 따라 하늘을 올려다보자, 그 위로는 셀 수 없이 많은 별이 환하게 흩뿌려져 있었다.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동안 밤에도 일을 하느라 제대로 하늘을 볼 일은 거의 없어서, 이런 하늘을 몇 년 만에 봤던가. 와아, 예쁘다. 오이카와가 숨을 들이키며 조용히 속삭였다. 우시지마는 그런 오이카와를 가만 눈에 담았다.
“오이카와, 네게 할 말이 있다.”
“어, 뭔데?”
듣는 둥 마는 둥 하는 오이카와의 반응에 우시지마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말을 이었다.
“좋아한다, 오이카와 토오루.”
“응, 그래.”
그의 말을 시큰둥하게 흘려 넘기자 우시지마가 가만히 눈만 끔뻑거렸다.
“내가 뭐라고 했는지 제대로 들었나?”
“알았다니까?”
“뭐라고 했는지 말해봐라.”
“계속 귀찮게 굴 거야? 그, 뭐였지. 아, 좋아한...다?”
말을 하던 도중에 오이카와의 눈이 동그래졌다. 잠깐만. 지금 고백한 거야? 이런 상황에서? 오이카와가 우시지마를 빤히 바라봤다. 그를 잠시 훔쳐본 우시지마가 평소처럼 딱딱한 얼굴로 불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얼굴만 보면 지금 하는 말이 사랑을 전하는 건지 정치판에 대해 논하는 건지 모를 정도였다.
“아주 오랫동안 좋아하고 있었다. 아마도 당시엔 자각하진 못했겠지만, 정말 어렸을 때부터. 너를 좋아하고 있기에 혼인을 거부했고, 너를 데리고 도망친 거다.”
분명 알고 있던 내용인데. 오이카와의 당혹감 위로 쿵쿵대는 소리가 스며들었다. 심장이 바로 귀 옆에서 울려대는 것 같았다. 난생 처음 겪어보는 생소한 느낌에 몸을 비틀고 싶었다. 가슴께가 시큰했고 불편했다. 이 상황에서 몸부림치며 빠져 나오고 싶었다.
“오이카와, 지금 당장 네게 감정을 되돌려 받길 원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더 숨길 생각은 없다. 아무도 너를 모르는 곳에서, 동등한 위치에서 관계를 새로 쌓자. 천천히 라도 괜찮으니, 네가 나를 좋아해줬으면 한다.”
이 얼마나 오만한 고백인가, 당장이라도 비웃으려던 오이카와는 어째서인지 그럴 수가 없었다. 얼굴 근육이, 아니, 그냥 온몸의 근육이 뻣뻣하게 굳었다. 물고기처럼 입을 뻐끔대었다가 도로 닫았다. 뭐라 답해야 할까. 입이 쉬이 떨어지질 않았다. 거절해야 하는데. 모든 걸 다 가진 네가 유일하게 가질 수 없는, 너 혼자만의 외사랑이라고 코웃음 쳐줘야하는데. 어쩐지 싫다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 이건 분명 우시지마 와카토시를 엿 먹일 기회를 제 발로 차는 거라서 그런 것 일거라며 오이카와가 자기 자신에게 해명했다.
‘그게 아니라면 이 느낌이 뭐겠어.’
-그럼 넌 어떻게 할 건데?
‘맞아! 받아준 다음에 이용해먹고 버리는 거야!’
-천박하게 자기합리화 하시네.
목소리가 뭐라고 하든, 오이카와는 다짐을 굳혔다. 우선 받아주고, 재산을 뜯어낸 후, 버려주는 거야. 뭐, 우시와카쨩은 찢어진 마음을 부여잡고 울면서 집으로 돌아가기나 하겠지. 완벽해!
“...아니야.”
오이카와의 목소리에 우시지마가 고개를 들었다.
“아니야. 나도,”
억지로 닫히는 입을 열어 말을 내뱉었다. 뭐하는 짓이야, 빨리 말해버려. 설마 이제 와서 죄책감이라도 느끼는 거야?
“나도, 우시와카쨩을,”
거짓말을 해서 그런 것일까. 오이카와가 생각했다. 어쩐지 심장이, 정확히는 그 부근이 저릿했다.
“....너를, 좋아해.”
입 밖으로 쏟아낸 순간, 오이카와는 뭔가가 크게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이러면 안 되는 것 같은데. 다른 사람에게면 몰라도, 우시지마에게는 그랬으면 안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이미 쏟아진 말을 다시 주워 담는 것은 불가능한 일. 우시지마의 눈이 당혹스러움에서 놀라움, 놀라움에서 안도로 변했다. 아, 아닌데. 이게 아닌데.
“그게 정말인가?”
“...어, 어.”
오이카와는 당장이라도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릿속이 딱딱하게 굳어버려서 제가 지금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수습은 어떻게 할지에 대한 생각은 굴러가던 도중에 그대로 멈춰버렸다.
“그, 그럼 나 먼저 잘게.”
오이카와가 재빨리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우시지마는 제자리에서 미동이 없었다. 오이카와는 머리가 핑 돌면서 어지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양 볼과 귀는 붉게 달아올랐고 심장은 쿵쾅댔으며 숨쉬기가 어려웠다. 한껏 부스럭대다가 적당히 자세를 잡고 눈을 감으려는데, 우시지마가 전에 들었던 것과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좋아해줘서 고맙다. 사랑한다, 오이카와 토오루.”
그 뜨거운 애정이 담긴 목소리와 정 반대로 오이카와는 쿵쾅대던 심장이 급정지라도 한 것 마냥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죄책감, 간질거림, 저를 향한 역겨움, 이상한 감정까지 한데에 뒤섞은 것을 삼키기라도 했는지, 기분이 끔찍했다.
‘너는 어디까지 나를 비참하게 만들 셈이야?’
찬란한 별의 장막이 두 사람 위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별은 기묘한 모양으로 얽힌 감정들에게 아무런 대답을 주지 않고 제 자리에서 빛날 뿐이었다. 찬란하게, 다만 찬란하게.
06.
여정의 끝
이상한 모양으로 꼬여버린 오이카와의 붉은 감정의 실은 그가 얼마나 노력한들 풀리지가 않았다. 우시지마와 교대를 위해 중간 중간 잠에서 깨어나면 그 문제로 저 자신과 씨름을 했지만, 항상 원점으로 돌아왔다. 그게 저를 제일 괴롭히고 있는 문제 1순위였는데 그 순위 따윈 다음날, 우시지마의 말로 인해 완벽히 밀려나게 되었다.
“곧 도착한다.”
“뭐? 어디에?”
“앞으로 우리가 지낼 도시를 말하는 거다.”
우시지마가 손을 뻗어 앞을 가리켰다. 아주 작았지만 분명 도시의 외곽이 보였다. 그걸 본 순간 오이카와는 들고 끙끙대던 빨간 실타래를 옆으로 던져버렸다. 드디어 이 사막생활에서 해방이다! 아무리 거친 삶을 살아왔대도 사막횡단은 전혀 저와 맞지 않았다. 천막 밑으로 느껴지는 모래 위에서 잠드는 것도 싫었고, 낙타 때문에 허리도 아팠다. 약 나흘이라는 기간 동안 어떻게 참았는지 궁금해질 정도로. 기나긴 여정의 끝이 보이자 마음에 약간이나마 여유가 생겼다. 동시에 기대감도 조금.
“기분이 좋아 보이는군.”
“그야 당연하지. 드디어 이 사막에서 벗어나는데.”
“도시도 여전히 사막 안에 있다만?”
“그 뜻이 아니잖아.”
오이카와가 잠시 인상을 찌푸렸다가 금방 다시 폈다. 기분이 좋으니 우시와카쨩의 멍청함 정도야 이 마음 넓은 오이카와씨가 넘어가주지!
“도시에 가는 게 그렇게 신나나, 오이카와?”
신이 나서 양 다리를 이리저리 흔드는 오이카와를 보고 우시지마가 물었다. 오이카와는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그러엄! 드디어 푹신한 침대에서 잠도 잘 수 있고, 제대로 된 음식도 먹을 수 있잖아? 우시와카쨩은 싫어?”
“싫은 건 아니다만, 너와 둘만 있는 시간이 줄어들잖나.”
오이카와가 눈을 끔뻑거리며 우시지마를 빤히 쳐다봤다, 지금 저 밥맛이 무슨 소리를 한 거지. 아니, 아무리 고백을 받아줬다지만 저런 말을 막 해도 되는 거야?
“...뭐래.”
그렇게 말하면서도 홧홧하게 달아오른 귓등은 숨길 수 없었다.
도시에 도착한건 하늘 정 중앙에 떠있던 해가 적당히 내려갔을 무렵. 도시의 입구라서 그런지 그동안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사람들이 보였다. 벌써 여기까지 그의 집에서 보낸 사람이 도착하진 않았겠지만, 소문이 나서 여기저기를 오가는 상인들이 제 이야기를 퍼뜨렸거나 비둘기로 소식을 보냈을 가능성은 무시하지 못했다. 아마 둘 다 염려해 두는 것이 제일 낫겠지. 우시지마는 일부러 낙타를 천천히 몰았다. 저 멀리서 상인 무리가 보였기 때문이다. 문지기들이 저들의 얼굴이라도 기억했다간 곤란하다. 그러니 사람이 많은 무리에 끼어서 허술한 틈을 타야한다.
“우시와카쨩, 왜 그래?”
오이카와의 부름에 우시지마는 조용히 하라는 듯 제 입에 손을 대었다. 그러고는 낙타의 뒤에 달려있는 주머니에서 양피지 두 개를 꺼내 하나를 오이카와에게 건넸다. ‘출입증명서?’ 오이카와가 고개를 갸웃하며 자세히 살펴보자 처음 보는 이의 이름과 신분이 적혀있었다.
“거기에 적혀있는 게 너다. 이름을 물으면 거기 쓰인 대로 대답해라. 적당히 찢어져야 하니 뻔뻔하게 행동해라.”
“찢어진다니? 여기서?”
“여기서 들킬 순 없지 않나. 나는 저 상인 무리 중간쯤에 끼어들 거다. 너도 적당히 끼어들어라.”
오이카와가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끄덕이곤 머리 위의 흰 천을 푹 눌러썼다. 고개를 숙이고 그 사이에 적당히 끼어들자, 다행이도 그들은 새로 등장한 인물의 존재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듯 보였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오이카와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출입증명서를 제시했을 때도 긴장했는지 살짝 주춤했지만 결국은 우시지마도, 오이카와도 별다른 일 없이 무사히 통과를 했다. 도시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오이카와가 환호성을 질렀다. 갑작스런 소리에 놀랐는지 눈을 크게 뜬 우시지마가 그를 조용히 시키려다 이내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들이 자리를 잡은 곳은 한 여관이었다. 겉도, 내부도 꽤 깔끔해보였다. 본가의 방 두 개정도를 붙여놓은 크기라 우시지마가에 비하면 턱없이 작았지만, 여러 명이 모여 생활하던 시종들 숙소에서 지낸 오이카와의 입장에서는 그리 좁진 않았다. 방을 보여준 여관 주인 할머니가 천천히 둘러보라고 방을 나가자 오이카와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우시지마를 쳐다봤다.
“돈 별로 없잖아. 별로 안 비싸다고 해도, 더 작은 방이 낫지 않아?”
“돈은 더 벌면 된다. 그리고 돈이라면 넉넉하게 가져왔다.”
“넉넉히 가져와봤자...”
그 말을 듣고 우시지마가 한쪽에 치워 넣은 자루 여러 개를 가져오더니 그 위에 쌓아둔 옷과 잡화를 치웠다. 그 아래에서 또 다른 자루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모든 자루의 입구를 열자, 금화는 물론이고 화려한 보석 장신구, 비단 옷, 금괴 등이 한가득 담겨있었다. 확실히 이 정도라면 여관비 정도야 우스워 보이겠지만. 그것보다도 오이카와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너...너 미쳤어? 이걸 이만큼 들고 온 거야? 오면서 강도라도 만났으면 어쨌을 뻔 했어?!”
“강도는 만나지 않았다.”
“그거야 운이 좋았으니까 그랬지!”
오이카와가 빼액 소리를 질렀지만 우시지마는 여전히 무덤덤했다.
“우리가 오가면서 사람 하나 만나지 않은 건 일부러 인적이 드물고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길을 갔기 때문이다. 강도는커녕 행인조차 만나기 어렵도록.”
“그래도 사람일은 모르는 거잖아!”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서 논쟁할 생각은 없다.”
“아악! 내가 말을 말아야지, 진짜.”
오이카와가 양손을 들며 말했다. 말은 잘해요, 정말. 철부지 도련님 아니랄까봐 대책 없이 구는 모양이 한숨만 나왔다. 이러다가 등쳐먹기도 전에 제가 그를 부양해야 하는 건 아닌지. 세상에서 제일 쓸데없는 걱정이라며 손으로 제 얼굴을 툭툭 친 건 그 다음의 일이었지만.
다행히도 이번 방엔 침대가 두 개였다. 장점은 전처럼 비좁은 곳에 억지로 달라붙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고, 단점은,
“침대 옆으로 밀어!”
“안 밀린다.”
침대가 붙어있었다는 점. 여기까지 와서도 붙어있어야 한다니. 오이카와가 제 얼굴을 양손에 묻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우시지마는 꽤 만족스러워하는 것 같았지만 말이다. 밤이 되면 등을 맞대고 잠이 들었지만 눈이 잘 감기지는 않았다. 어쩌다 손이라도 스치면 그 이상한 감각에 사로잡혀 기분이 이상해졌다.
어스름한 새벽빛이 창문을 통해 들어왔다. 오이카와는 아직 잠들지 못했다. 우시지마가 뒤척이다 몸을 틀어 그를 마주본 자세로 누웠다. 감긴 눈 위로 미간을 살짝 찡그리더니 다시 인상이 펴진다. 오이카와가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평소의 굳건한 표정과는 다른 얼굴이라 어쩐지 웃음이 났다. 이렇게 자는 모습만 보면 참 괜찮은데 말이야. 평소에 없을 기회이다 보니 저도 모르게 그를 뜯어보고 있었다. 생각보다 잘생긴 것 같고. 물론 이 토오루님 만큼은 아니지만. 오이카와가 빤히 쳐다보자 시선을 눈치 챘는지 우시지마가 나른하게 눈을 떴다. 반쯤 감긴 눈 사이로 눈동자 두 쌍이 얽혔다. 놀라 굳어있는 사이 우시지마가 손을 뻗어 오이카와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오이카와가 눈을 깜빡이자 손이 머리에서 볼로 스르르 미끄러져 내려왔다. 가만가만 볼을 쓸자 오이카와의 표정이 풀어졌다. 뭐라 부르기 애매한 기분이었다. 편안하고 푹신하고 달았다. 예전에 먹어봤던 설탕과자랑 비슷한, 그런 느낌. 오이카와의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졌다. 따뜻하고 커다란 손이 어깨로 내려가 가볍게 토닥였다. 아, 이런 감정을 뭐라고 부르더라. 어두워지는 시야에서 명칭을 찾으며 서서히 잠에 빠졌다.
도시에서의 생활은 빠르게 흘러갔다. 그새 사흘이라는 시간이 쏜살같이 지났다. 우시지마는 나가서 꽤 오래 있다가 저녁이 다 되어서야 돌아오곤 했다. 자루를 들고 나가서 현금과 음식을 들고 돌아오는 걸 보니 가져온 물건들을 조금씩 팔고 있는 듯 했다. 오이카와는 난생 처음 주어지는 자유를 만끽하고 있었다. 해가 중천에 뜬 채로 일어나도 아무도 그에게 뭐라고 하지 않았다. 제가 나서서 청소를 할 필요도, 음식을 할 필요도 없었다. 남아도는 시간에는 침대에서 뒹굴 거리거나 밖으로 나가 도시구경을 했다. 이 도시는 전의 도시만 하진 않았지만, 꽤 큰 편이었다. 우시지마의 말에 따르면 이 곳에 우시지마가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의 집안이 실세를 잡고 있어서 자기네 집안에서 함부로 사람을 풀지 못하는 것이라고 했다. 아마 저가 없어진 사실도 최대한 조용히 알릴 것이라고 덧붙였다.
싹싹한 성격 탓인지 시장에서 마주치는 상인들은 오이카와가 구경만 하는데도 사과를 쥐어주거나 덤을 잔뜩 담아주는 등, 대부분 그에게 호의적이었다. 그 누구도 저를 막 대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저를 업신여기지 않았다. 정말, 꿈만 같았다.
-그런다고 네가 어떤 존재인지 잊어버릴 수 있을 것 같아?
가끔 목소리가 들려오긴 했지만, 오이카와의 기분은 대꾸도 하지 않고 무시해버릴 정도로 좋았다. 당분간은 이 꿈 속에 파묻혀있을 권리가 있다고 저 자신에게 일렀으니.
여느 날처럼 밖을 돌아다니던 오이카와는 길모퉁이에 붙어있는 양피지를 발견했다. 지나치려고 몸을 틀었는데 익숙한 무언가가 눈을 잡아끌었다. 가까이 다가가 그 내용을 확인한 그의 낯엔 동요는 없었지만 아무도 그쪽을 보고 있지 않을 때 휙 뜯어서 제 옷 속에 구겨 넣었다. 주변을 돌아보자 다행히도 비슷한 것은 없었다. 우시지마가 근처에 있으면 불러내서 보여주기라도 할 텐데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알지를 못해 홀로 방으로 돌아와 기다렸다.
우시지마가 돌아온 것은 언제나 그랬듯, 저녁 무렵. 음식을 사온 그가 식탁 위에 그것들을 늘여놓았다. 쪼르르 음식으로 달려간 오이카와는 식사 중에 결국 웃음을 터뜨리며 이전의 양피지를 건네었다.
“이것 봐, 우시와카쨩!”
우시지마가 종이를 건네받고 읽어 내려갔다. 커다란 키에 건장한 체구, 짙은 눈썹과... 길게 나열된 우시지마의 외모 묘사가 적혀 있었고 연락할 수단과 작은 우시지마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었다. 오이카와가 그걸 가리키며 깔깔 웃어대었다.
“우시와카쨩이랑 똑같이 생겼다!”
실물과는 많이 달라 보이는, 어딘가 멍청한 인상의 그림에 우시지마도 얼굴을 구겼다. 사실 얼굴이 구겨진 이유는 그림 그 자체보다도 배를 붙잡고 비웃는 오이카와 때문인 듯 했지만 말이다. 우시지마는 한동안 그러고 있더니 금세 얼굴을 폈다.
“그만 웃고 밥이나 먹어라.”
오이카와가 너무 웃어서 생긴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았다. 미안, 미안. 그렇게 말하며 손사래를 치다가도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이걸로 우시와카쨩을 찾는 건 어렵겠지만, 그래도 조심해.”
“알겠다. 걱정하지 말아라.”
우시지마가 오이카와를 안심시켜는 듯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커다란 손이 머리를 부드럽게 쓸자 오이카와는 평소보다 제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또 이상한 그 기분. 두둥실 떠오르는 것 같았다. 동시에, 동시에 두려웠다. 타오르듯 밝은 해 때문일까, 바닥이 보이지 않았다. 여기서 추락하면? 그러면 저에겐 무슨 일이 생기는 것인가. 밑바닥이 보이지 않는 깊고 어두운 수렁으로 빠져 버릴까봐 무서웠다. 거긴 분명 춥고, 아무도 없는 곳이겠지. 하지만 이제는 인정을 해야 할 때였다. 그 끝이 어떻건, 감정을 부정하고 파묻어 모르는 척 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차라리 처음부터 외면해서 끝까지 마주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언제부터였을까. 언제부터 이렇게 이상한 기분이 들었더라. 언제부터 이렇게 아팠더라.
‘아, 내가,’
손이 떨어지자 눈이 마주쳤다. 우시지마가 옅게 웃었다. 오이카와의 얼굴이 상기되었다. 웃으려던 얼굴이 어그러졌다. 분명히 웃으려고 했는데, 감정이 흔들리니 표정도 마음대로 움직이지가 않았다. 마음 한 구석이 먹먹했다. 금방이라도 울음이 나올 것 같았고, 그 모습은 제 얼굴에도 희미하게 드러났다. 아주, 아주 오랫동안 심장의 한 구석에 묻어두었던 것을 헤집어놔 꺼내었다. 여린 살갗에 깊게 박혀있던 유리파편을 뽑아내듯이. 아, 아파.
‘우시지마를 좋아하는구나.’
“오이카와?”
우시지마가 오이카와를 살펴보더니 걱정스레 이름을 불렀다. 딱딱하게 굳었던 오이카와의 얼굴이 스르르 풀렸다. 그가 살며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한 번도 보인 적 없었던 환한 미소를 지었다.
“좋아해, 우시지마.”
07.
새로운 시작
“오이카와, 같이 나가지 않겠나?”
“좋아. 어차피 할 일도 없고. 무슨 일인데?”
침대위에 늘어져 있던 오이카와가 부스스 일어나서 대답했다. 우시지마가 제 머리를 정리했다.
“오늘부터 준비를 시작할거다.”
“준비?”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던 오이카와가 고개를 좌로 슬 기울였다. 그게 무슨 소리야?
“정착하려면 일정한 수입원이 필요하지 않겠나. 우리 둘 다 전문기술이 없지만, 나는 아버지를 따라 다니며 어느 정도 배운 게 있다. 그래서 장사를 하는 게 낫다는 결론을 내렸다.”
“뭐로 장사를 할 건데?”
“그동안 알아보고 있었지만, 아직 확정은 짓지 않았다.”
“오늘 하는 건 시장조사라는 건가.”
침대에서 데굴데굴 굴러 내려온 오이카와도 옷을 갈아입었다. 상의를 벗고 옷을 찾는데 뒤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돌리자 우시지마가 황급히 고개를 돌리는 게 보였다.
“우시와카쨩, 지금 훔쳐보시는 건가요?”
“무슨 소리냐. 본 적 없다.”
모르는 척 하시겠다 이거지? 오이카와가 들고 있던 옷을 던졌다. 던진 옷은 우시지마의 얼굴에 명중했다. 우시지마가 얼굴에서 스르르 미끄러지는 옷을 집어 바닥에 떨어뜨렸다.
“다 갈아입을 때까지 나가있어.”
“알았다.”
잔말 없이 우시지마가 방에서 나가는 것을 확인한 오이카와가 그의 표정을 떠올리며 작게 키득거렸다.
오이카와가 소지하고 있는 옷은 대부분 들고 오지도 않았지만, 일할 때 입는 용도이기 때문에 밖에서 입기엔 추레했다. 그래서 덩치 차이 때문에 품은 컸지만 키가 얼추 맞아, 제 몸에 맞게 수선한 우시지마의 옷을 입었다. 오이카와가 갈아입고 나오자 우시지마가 가볍게 입 꼬리를 끌어올렸다.
“시장보다도 네 옷부터 사야겠군.”
“오이카와, 이건 어떤가.”
우시지마가 양탄자 두 개를 들고 묻자 오이카와가 왼쪽의 것을 가리켰다.
“그게 더 나아.”
“알겠다.”
집중해서 물건을 찬찬히 뜯어보는 우시지마와는 정반대로 오이카와는 어린아이처럼 잔뜩 들떠있었다. 새 옷을 입어본 게 몇 년 만인지. 그동안 다른 시종들이 입던 옷을 물려 입었기 때문에 이런 옷을 가져보는 건, 그래. 사실 처음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 것을 차려입고 시장에 들어서자 바람에 날려 나풀거리는 옷감과 형형색색의 양탄자가 눈을 사로잡았다. 이쪽 방향으론 와 본적이 없기도 했지만, 아름다운 것들이 제 눈을 사로잡는 것은 언제나 신났다. 양탄자 직조공들이 작업하고 있는 공간에 들어갔을 땐 벌어지는 입을 닫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여기저기에 붉은색 바탕에 알록달록한 기하학적인 문양이 있는 양탄자가 널려있었다. 천장에 매달아 둔 것도, 작업 틀 위에 미완성으로 올라와있는 것들도 전부 화려했다.
“와아아...”
결국 입술 틈으로 새어나오는 탄성을 막지 못했다. 주변에 아무도 없어서 다행히 그 소리를 들은 사람은 없는 듯했다. 저쪽에 있는 우시지마는 그곳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듯 했다. 꽤 괜찮게 이야기가 되었는지 목석같은 표정이 미묘하게 밝아졌다. 그간 함께 지내지 않았으면 분명 봐도 알아채지 못했으리라.
문득 오이카와에게 어떤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이대로 이곳에서 우시지마와 계속 사는 것도 나쁘지 않아보였다. 아니, 생각보다 꽤 괜찮은 선택일 것 같았다. 우시지마에 대한 자신의 감정도 인정했고, 우시지마도 저를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자본도 충분했고 여기서의 삶은 이전의 우시지마가에서 지낸 것과 비교도 하지 못할 정도로 좋았다. 새로운 출발을 하는 거야. 아무데도 가지 않고 이대로, 단둘이, 계속.
-네가 발버둥 쳐봤자야. 그렇게 살면, 네가 그와 같아질 것 같아?
‘이제 나도 같아질 수 있어. 태생에서 벗어나서,’
-태생에서 벗어나?
목소리가 소름끼치는 소리로 깔깔거렸다. 한동안 무시해서 잠잠해 진 줄 알았는데, 그간 안 보인만큼 목소리가 평소보다 크게 들렸다.
-누가 태생에서 벗어나. 너는 천박한 네 어미와 똑같다니깐?
‘그 사람 얘긴 꺼내지도 마!’
거친 숨소리가 울렸다. 아차, 여긴 밖이지. 저도 모르게 화난 표정을 지은 오이카와가 주위를 살피고 숨을 가다듬었다.
-그 사라아암? 마치 남인 것처럼 말한다. 너와 피가 이어진 네 어머니야. 네가 천박한 무희의 사생아라는 신분은 속일 수 있어도, 피를 이어받은 이상 그 성질은 숨길 수 없어.
오이카와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주변에 있던 사람 몇 명이 그를 이상하게 쳐다봤지만 허튼 곳에 낭비할 시간은 없는지 도로 제 일로 돌아갔다.
‘아니야, 그렇지 않아.’
-네가 귀족 집 도련님과 함께 지내느라 네 위치를 잊어버린 것 같은데, 아무리 발버둥 쳐도 넌 절대로 그처럼 될 수 없어.
‘두고 봐. 전부 없던 일처럼 만들어버릴 거야.’
-그거 참 기대된다!
목소리가 비꼬며 배를 잡고 웃었다. 오이카와의 눈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아니야, 듣지 마. 괜찮을 거야. 속으로 저에게 중얼거리며 제 자신을 진정시켰지만 효과는 그리 크지 않았다. 마른침을 몇 번 삼켰다. 도저히 어떻게 되지를 않자 오이카와가 이야기를 끝내고 안을 둘러보고 있는 우시지마에게 달려갔다. 그런 건 전부 무시하는 거야.
“안색이 나쁘다, 오이카와.”
우시지마가 제 쪽으로 달려온 오이카와를 보며 걱정스레 말했다. 아픈 거라 생각했는지 따뜻한 손이 제 이마를 짚었다. 오이카와가 고개를 저었다. 그와 몸이 닿자 안정이 되었다. 마법처럼 가쁜 숨이 잦아들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배고파서 그런가, 밥 먹자.”
걱정 어린 표정의 우시지마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오이카와가 그의 등을 떠밀었다.
“빨리, 나 배고파.”
그렇게 괜찮다고 난리를 치는 반응에도 우시지마는 오이카와의 상태를 걱정했다. 얼마 후 창백하던 오이카와의 얼굴에 다시 혈기가 도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마음이 놓였다. 처음에는 질색하는 그를 데려온 것이 저만의 이기심 때문이라는 죄책감이 많이 들었다. 하지만 역시 데려온 것에 후회는 없었다. 그리고 요즘 그의 모습은 결국 제 선택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집에선 오이카와가 위험한 고비를 넘긴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창고의 그 사건도 그렇지만, 그가 과로나 열사병으로 쓰러지는 모습을 본 우시지마는 상당히 오래 전부터 그를 데리고 집을 나갈 계획을 세웠었다. 아버지를 따라 다른 도시로 이동하며 길을 익히고 어느 길을 택해야 할지, 어떤 방향으로 가야할지를 배웠다. 몇 년에 걸쳐서 이어진 일이었다. 사실은 때가 되면 더 멀리 가려고 했는데, 갑작스런 일정의 변경으로 사막을 건너며 오이카와를 쉬게 하지 못한 점이 제일 마음에 걸렸다. 오이카와가 기쁜 표정으로 입에 음식을 넣었다. 우시지마의 얼굴에 웃음이 걸렸다.
밤이 저물어서야 방에 도착한 둘은 등잔에 불을 밝혔다. 잠시간의 어색한 침묵. 두 눈이 맞닿자 우시지마가 팔을 벌려 오이카와를 품에 안았다. 오이카와에게도 조심스러움이 느껴질 정도로 세상에 단 하나 뿐인 보석을 다루듯, 그렇게 다정하게. 소중한데 그동안 부서질세라 제대로 만져보지도 못했다. 그동안의 골이 너무 깊고 넓어서 그걸 넘어설 수 있을 거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다. 십년이 넘는 기간을 넘어, 마침내 마음을 전했다. 그리고 통했다. 우시지마가 한동안 고개를 오이카와의 어깨에 파묻더니 그와 눈을 맞췄다. 허락을 구하려 입을 열려 했는데, 벌어진 틈새에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입을 맞췄다. 입술이 맞닿고 혀가 얽혔다. 그동안 서로를 향한 감정을 참았던 것에 대한 억울함의 표시라도 되는 듯 격렬하고 정신이 없는 키스였다. 달콤한 입맞춤은 몇 번이고 계속되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도 서로가 세상의 마지막 구원이라도 되듯 계속 매달렸다.
“하아, 그동안, 이러고...싶어서, 어떻게 참았대?”
마침내 떨어진 오이카와가 숨을 몰아쉬면서도 도발하듯 말했다. 우시지마는 귀에 들어오지 않는 건지, 고의적으로 무시하는 건지 몰라도 전혀 개의치 않아했다. 짐승이 먹잇감을 노려보듯 당장이라도 덮칠 기세였지만, 이성으로 꾹꾹 참아내는 듯 했다. 오이카와는 보고도 모른 척을 했지만. 질척한 입맞춤의 끝이라는 표시로 오이카와가 입술에 가볍게 뽀뽀를 하고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오늘은 여기까지. 참을 수 있지?”
“한 번만 더해주면 그럴 수 있을 것 같다만.”
말이 끝나기 무섭게 뜨거운 입맞춤이 서로의 이성의 한계를 시험하듯, 다시 아슬아슬하게 이어졌다. 세상에 단 둘 밖에 남지 않은 듯이. 모든 것을 잊게 해주는 마법처럼.
안타깝게도 모든 마법에는 깨어나야 할 시간이 있다. 12시의 종이 울린 신데렐라에게도, 영원한 잠에 빠진 숲속의 미녀에게도. 오이카와 토오루의 마법이 풀린 건 우습게도 그날 자정이었다.
음식 맛 좀 보라는 여관 주인의 등장으로 산통이 깨진 입맞춤은 거기에서 딱 끝났다. 둘 다 너나 할 것 없이 피식 웃고는 이만 자자며 침대에 누웠다. 우시지마가 등을 돌리고 누운 오이카와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우시와카쨩, 덥거든요?”
말로는 그렇게 툴툴댔지만 저도 싫지는 않았는지 오이카와도 가만히 눈을 감았다. 감긴 팔에 조용히 손을 둘렀다. 앞으로는 이렇게, 둘이서 새로 시작하는 거야. 오늘 밤엔 달콤한 꿈을 꿀 수 있을 것 같았다. 우시지마가 그의 목덜미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앞으로는 행복하게 해주겠다.”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팔을 토닥이던 오이카와의 손이 멈췄다. 꿈결로 빠지던 잠도 훌쩍 달아나버렸다. 펑. 두둥실 떠오르던 풍선이 터졌다. 거기에 매달려있던 남자는 저가 떨어지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 아래로, 아래로.
-행복! 아하하하하! 들었어? 행복이래!
‘나도, 행복할 수,’
-설마 진짜로 네게 행복 같은 사치가 어울린다고 생각해? 여태까지 네가 살아온 삶을 돌아봐. 너는 행복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이야.
오이카와가 눈을 내리깔고 흐느끼듯 아주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나도, 알고 있어.”
-알고 있으면, 바라질 말아야지. 네겐 꿈을 꿀 권리조차 없어.
날카로운 목소리에 몸을 흠칫했다. 뭐라고 반박을 하고 싶은데, 그의 머릿속에선 도저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오히려 목소리가 하는 말이 맞는 것 같아서, 더 화가 난 걸지도 모르겠다. 행복이라는 단어는 확실히 저에게 안 어울리는 단어이자 사치였다. 절대로 손에 넣을 수 없는 것이자 가져서는 안 되는 것.
-넌 평생 불행해야 돼.
목소리가 오이카와에게 속삭였다. 오이카와가 눈을 감았다.
08.
백일몽
텅 빈 방에서 오이카와가 덩그러니 침대에 앉아있었다. 별로 무언가를 할 기분이 아니었다. 분명, 어제의 일이 그를 유토피아에서 현실로 돌려놓았기 때문이겠지. 샛노란 햇살이 갈색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정말 바보 같은 꿈을 꾸고 있었구나.’
어쩜 이렇게 멍청할 수가 있었을까.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모든 과거를 잊고 새로 시작한다는 게, 듣기만 해도 웃음이 나왔다. 세상은 어린이용 동화가 아니었다. 그렇게 이상적이기만 한 삶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걸 답지 않은 행복에 취해 잊고 있었던 것이다. 멍하니 따뜻한 햇살에 몸을 맡기던 오이카와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옷을 입고 나가는 그의 손에는 구겨진 양피지가 들려있었다.
“어머니가 너를 증오하는 이유는 후계자 문제가 제일 크지만, 핵심적인 이유는 질투심 때문이다.”
“질투심?” 오이카와가 감은 눈 사이로 간신히 목소리를 끌어올렸다.
“어머니는 질투가 심하신 분이니까. 아버지가 널 거둔 이유는 네가 네 어머니를 닮아서이다. 십년이 지났는데도 잠깐 만난 사람을 잊지 못하는 걸 이해하지 못했는데, 너를 보니 알 것 같다.”
-네가 누굴 닮았다고?
평생 불행해야한다고, 목소리가 말한 직후였다. 금이 가던 오이카와의 세상이 천천히 바스라졌다. 어머니. 그런 천한 핏줄에서 벗어나려고 평생 안간힘을 썼다. 줄곧 자라며 제 어미에 대한 것을 들어왔다. 미인이었다는 이야기도 들었지만 그건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오이카와에게 있어 그건 칭찬이 아니었다. 천하게, 천박하게, 웃음과 몸을 팔던 사람. 저와 똑같이 더럽고 불결한 존재. 우시지마가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오이카와는 둘째부인에게 그런 소리를 들으며 커왔다. 제 어미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며 고개를 젓던 어린 시절도 있었지만, 실제로 그리 틀린 말도 아니었다. 그래서 나이를 먹을수록 제 어미의 존재를 제 안에서 파내버리려고 했다. 그렇잖아, 무책임하게 나를 버리고 간 사람인걸. 처음부터 그런 곳에 버려두고 가지 않았다면. 차라리 그랬다면. 오이카와는 그녀에게서 몸부림치며 벗어나려고 했지만, 거미줄에 걸린 나비처럼 벗어나긴커녕, 그럴수록 그 안에 얽매이고 만 것이다. 만약 그에게 더 여유가 있었더라면 그 사실을 예전에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에게는 여유를 가질 시간도 없었고, 이제는 너무 늦어버렸다. 순순히 그 사실을 인정하기에는.
새로운 출발을 위해 타지에 왔다. 찰나의 시간이었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영원히 행복하게 살 것이라고 믿었다. 과거는 전부 묻어버리고. 천한 제 핏줄도, 저를 괴롭히던 목소리에서도, 어머니의 존재에서도 벗어날 수 있으리라고. 그런데 그 모든 것이 백일몽에 지나지 않았다.
“정말, 바보 같아.”
-이제 알겠어?
‘응. 오래 걸렸지만, 이제야 알겠어.’
그런 추한 저와 다르게, 우시지마는 빛났다. 환하게 빛났다. 그동안 누리던 것을 벗어던지고서도 제 갈 길을 세우고 당당하게 앞으로 걸어 나갔다. 과거에 틀어박혀서 주저앉아버린 제 자신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너는 태양이다. 아주 눈부신 태양. 그에 비해 저는 회색 세상 속에 갇힌 그림자였다. 태양과 그림자. 절대로 만날 수 없는 두 존재. 그래, 처음부터 우리는,
“동등해질 수 없던 거야.”
새하얀 소망이 산산조각 났다.
오이카와가 한 건물에 들어갔다. 조금은 낡고 허름한 여관. 그 안에서 누군가를 찾았더랬지.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그가 다시 나왔다. 들어가기 전과 비교했을 때 모든 게 그대로였다. 단, 하나. 손에 들려있던 양피지가 사라져있었던가. 거리로 나오자 걸음걸음이 무거웠다. 명치라도 얻어맞은 것처럼 속이 답답했다. 입안이 바싹 말랐다. 세상이 끔찍하게 보이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태양이 내리쬐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를 바싹 태워버릴 것만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빨리 방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도망치고 싶었다. 저 자신에게서.
그가 침대에 늘어져 있는 동안 무심하게 시간은 흘러갔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인기척이 느껴져 감은 눈을 부스스 뜨자 눈앞에는 가장 그리던 사람이 있었다.
“깨우지 않으려고 했는데.”
오이카와가 대답 대신 배시시 웃어보였다. 아직 해가 떠있는 걸 보니 그리 오래 잠든 건 아니었나보다. 그의 옆에 우시지마가 앉았다. 오이카와가 팔을 뻗어 우시지마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오이카와의 쪽에서 먼저 애정표현을 하는 일이 드물었기에 우시지마는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오이카와는 그 온기에 매달렸다.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 오이카와.”
우시지마가 그의 머리를 어루만지자 오이카와가 그 손에 제 머리를 부볐다. 좋은 일. 그런 일은 없었다. 오히려 좋지 않은 일만 있었지. 그러니 사랑하는 당신에겐 애매모호한 대답을.
“글쎄.”
오이카와가 몸을 뒤집어 우시지마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 마주친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오늘은 질리도록 그의 얼굴만 보고 싶었다.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의 우시지마도 무슨 짓을 하는 건지 관찰이라도 하는 것 마냥 그를 마주 바라보았다. 문득 떠올랐는지 오이카와가 우시지마에게 물었다.
“우시와카쨩은 바다, 가본 적 있어? 많이 돌아다녀봤잖아.”
“한 번도 없다.”
“나는 바다를 직접 보는 게 소원이었어.”
“그런가.”
“바다에는 사막의 모래만큼 물이 있대. 너무 많아서 넘실거린댔나. 그리고 물결 위로 산산 조각나는 햇빛이 그렇게 아름답대. 눈이 부셔서 뜰 수 없을 정도로. 천개의 태양이 뜬 것처럼.”
옛날이야기를 하듯 오이카와가 꿈에 부푼 목소리로 바다에 대한 이야기를 읊었다. 한동안 말이 없던 우시지마가 나직하게 말했다.
“나중에 바다에 함께 가자.”
“응.”
오이카와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릴 적의, 지켜지지 못한 그 약속처럼.
창문 사이로 바람이 살랑 들어왔다. 오이카와가 무릎에서 머리를 떼고 양팔을 뻗어 우시지마의 목에 감았다. 천천히 상체를 들어 코가 맞닿을 거리까지 올라오자 턱을 들어 먼저 입을 맞췄다. 입맞춤 한 번에 사랑을. 입맞춤 두 번에 사과를. 입맞춤 세 번에 작별을. 제멋대로, 그렇게 이름을 붙였다.
“오늘 조금 이상한 것 같군.”
입이 떨어지자 우시지마가 의아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이카와는 그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웃어넘겼다.
“무슨 말 하는 건지 모르겠네.”
“정말 무슨 일 있었나?”
직감이 좋은 건지, 그의 말이 오이카와에게 파고들었다. 대답대신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눈꼬리를 휘면서 미소 지었다.
“걱정이 많으면 빨리 늙어요, 우시와카쨩.”
“괜찮다. 전부 네 걱정일 테니. 그리고 너도 나와 함께 늙어갈 것 아닌가.”
심장에 누군가가 창을 꽂아 넣은 것 같았다. 오이카와가 우시지마를 향한 자신의 마음을 인정했던 날보다 몇 배로 더 아팠다. 그와 함께 늙어가는 미래도, 사실은 염치없지만, 아주 잠깐 그려봤었다. 금세 머릿속에서 지워내었지만. 손에 쥘 수 없는 신기루는 잊어버리는 것이 옳다. 아니, 옳아야만 했다.
-넌 정말 끔찍한 사람이야.
‘나도 알아.’
마지막 키스를 나누며 오이카와가 대꾸했다.
‘그래도 이런 짓은 오늘로 끝이야.’
내일로 이 모든 놀음은 끝이 나기 때문이다. 오이카와는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했다. 대신 옆에서 곤히 잠든 제 애인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며, 그렇게 밤을 지새웠다.
09.
천 개의 태양
밝은 햇살이 내려 아침이라는 것을 알렸다. 마침내 우시지마에게서 눈을 뗀 오이카와가 슬쩍 밖을 내다보았다. 항상 그렇듯 쨍쨍한 하늘과 뜨거운 공기가 그를 맞이했다. 이별하기 딱 좋은 날씨이지 않은가. 눈이 부셨는지 손으로 차양을 만들어 말없이 밖을 보던 오이카와가 몸을 틀어 창문에 등을 돌렸다. 곤히 자고 있는 우시지마의 입술에 입을 맞춰서 그를 깨웠다. 우시지마의 눈썹이 움직이더니 서서히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그의 눈 속에 오이카와가 한가득 담겼다. 오이카와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밝았다.
“그만 일어나, 우시와카쨩. 밖에 나가자.”
간단히 아침을 먹은 둘은 시장으로 향했다. 우시지마가 갑자기 같이 나가자고 한 이유를 묻자 오이카와는 그냥, 이라고 대답했다. 어디서 무역상인들이라도 도착한 건지 오늘따라 시장은 사람들로 붐볐다. 그러거나 말거나 오이카와는 우시지마의 옷소매를 붙잡고 이리저리 끌고 다니며 멀리서 들여온 진귀한 물건들을 구경했다. 특이한 색으로 반짝거리는 보석, 다홍색을 내는 종이, 바람처럼 가벼운 비단. 아이처럼 웃으며 그런 것들을 가리키며 가득 웃었다. 어제부터 오이카와의 상태가 이상한 것 같아 신경 쓰고 있던 우시지마도 그런 오이카와의 모습을 보며 마음을 놓았는지, 그가 소매를 잡아끌지 않더라도 흐뭇한 표정으로 뒤따라갔다. 개구쟁이처럼 여기저기를 뛰어다니던 오이카와 토오루는 일부러 우시지마를 놓쳤다. 혼자 저 멀리, 사람들 사이로 섞여든 것이다.
‘네 존재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나봐. 어리석은 오이카와 토오루. 넌 처음부터 그랬듯 그림자 속에서 살아가야 해. 태양 옆의 자리는 네 것이 될 수 없어.’
언젠가 목소리가 저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때는 대꾸하지 않았었다. 보지 못한 척, 듣지 못한 척을 하며, 그런 말을 들었다는 사실 자체를 외면했다. 그래도 말의 무게는 생각보다 무거워서 그동안 그 말은 줄곧 마음 한 구석에 남아있었다. 그와 같아질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자, 무겁던 그 자리는 텅 비게 되었다. 이제는 그 가벼워진 무게가 그렇게 신경 쓰였다.
고개를 흘끗 돌리자 저 멀리서 우시지마의 모습이 보였다. 그를 찾는 듯 이리저리 살피는 모양새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오이카와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결국 네 말이 맞았어. 나 같은 천한 것이 잘도 여기까지 왔네.”
-그럼 어서 해. 모든 것을 제자리에 돌려놓을 마지막 기회야.
“잠시만."
사람이 넘쳐나는 시장 통이지만 걸음을 멈춘 오이카와는 그 자리에 우뚝 섰다. 마지막으로 우시지마의 모습을 머릿속에 새기고 싶었다. 밤중에 희미하게 비친 달빛 아래에서 수백 번도 더 보았던 얼굴이지만, 역시 그는 태양 아래서의 모습이 더 어울렸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적어도 제 눈에는 그리 보였다. 네가 나를 발견하고 이리로 오면, 이별의 시작이야. 그러니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이쪽을 눈치 채지 말았으면 했다. 하지만 시간은 그리 느리게 흐르지 않았다. 우시지마가 저 멀리서 오이카와를 찾아냈다. 딱딱하게 굳어있던 표정. 눈이 마주치자 풀어지는 눈빛. 이젠 두 번 다시 볼일이 없겠지. 오이카와는 방긋 웃으며, 떨어진 것이 의도하지 않은 행동인양 손을 흔들었다. 작은 미소를 지은 우시지마가 오이카와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그를 향해 걸어왔다.
“갑자기 사라져서 놀랐다."
“미안, 미안. 그보다 잠깐 오이카와씨랑 어디 좀 같이 가주지 않을래? 가보고 싶었던 곳이 있거든."
“그러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의 우시지마였지만 그는 순순히 오이카와를 따라갔다. 시장판을 지나 여전히 사람이 붐비는 골목으로 들어서자 집집마다 걸어둔 높은 천막 사이사이로 해가 내리쬐었다. 오이카와는 햇빛에 손을 뻗으며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아주 작게, 우시지마에겐 들리지 않을 정도의 소리로, 오이카와가 혼잣말을 했다.
“주제도 모르고 설친 거지. 같이 있다 보니 착각에 빠진 거야. 태양 곁에 오래 있다 보니 나도 빛이 날거라는 착각에."
골목골목을 지날수록 주변을 지나가는 사람이 줄어들었다. 마침내 주변에 사람이 없는 곳까지 다다랐을 무렵, 오이카와가 모퉁이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지금이라도 돌아갈까. 여기서 그만 둘까. 온갖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지만 오이카와의 결심을 흔들 정도는 아니었다. 그가 제자리에서 빙그르 돌아 우시지마를 바라봤다.
“여기까지야."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뜬금없는 오이카와의 말에 우시지마가 멀뚱히 그를 쳐다봤다. 오이카와가 생긋 웃었다. 이제는 정말 돌아갈 수가 없었다. 사랑스러운 그대여. 안녕, 안녕히.
“내가 우시와카쨩의 반항 놀이에 장단 맞춰주는 것도 여기까지라고."
오이카와가 말을 끝내며 모퉁이 뒤로 손짓을 하자 벽 뒤에서 장정 여섯 명이 들이닥쳤다. 우시지마가 움직일 새조차 없이 그들은 순식간에 그를 제압해서 무릎을 꿇렸다. 우시지마가 몸부림을 쳤지만 그가 아무리 힘이 세다한들, 건장한 성인 남성 여섯을 떨쳐내기엔 역부족이었다.
“이게 무슨...!"
우시지마가 오이카와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혼란과 망설임이 섞여있었다. 불쌍하게도, 아직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것이겠지. 오이카와가 혀를 찼다. 어째서 그는 이런 지경까지 와서도 저를 믿고 있는 것인가.
“그 잘난 머리로도 이 상황이 파악이 안 되나 보네.”
설마 하던 우시지마의 눈빛이 오이카와의 말을 멍하니 듣더니 그 의미를 파악하자 순식간에 분노로 바뀌었다. 정답! 오이카와가 생글생글 웃으며 대꾸했다. 그런 오이카와를 노려보며 그가 이를 갈았다.
“오이카와, 지금 이게 뭐하는 짓이지?"
“집에 돌아가."
우시지마의 표정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그가 어깨를 움직이려하자 뒤의 남자가 그의 등을 우악스럽게 눌렀다.
“이 상황이 안 믿기나 보네. 내가 우시와카쨩이랑 놀아주는 거에 질려서 그래. 아, 이분들은 우시와카네 집에서 보낸 사람들이니까 안심하구."
“오이카와!”
분노와 경멸, 배신의 아픔이 그 짧은 포효에 섞여있었다. 우시지마가 거칠게 반항하자 그의 팔을 잡고 있던 남자 중 하나가 투명한 액체를 적신 두툼한 천으로 그의 코와 입을 막았다. 그러자 우시지마가 고개를 뒤틀었다. 그 와중에도 그의 시선은 오롯이 오이카와에게 고정되어있었다. 오이카와가 잠시 싸늘한 시선으로 그를 마주하더니 그 중 한명에게 손을 내밀었다.
“약속했던 보수, 지금 줘요.”
남자가 낙타에서 커다랗고 묵직한 주머니를 내려 오이카와에게 넘겼다. 묵직한 주머니는 금화로 꽉꽉 채워져 있어 절그럭거리는 금속의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오이카와가 그 입구를 열어 금화를 한 주먹 꺼냈다. 약효가 돌은 것일까, 아니면 끝까지 기대고 있던 일말의 가능성이 무너져서일까. 우시지마가 반항을 멈추고 멍하니 그 모습을 쳐다봤다. 오이카와가 도로 금화를 집어넣고 입구를 묶었다.
“뭐, 덕분에 재밌었어. 애인놀음에 어울리는 건, 솔직히 고역이었지만.”
오이카와가 깔깔거리며 웃자, 몸에 힘이 풀리며 멀어져가는 의식 속에서도 우시지마가 오이카와를 노려보았다. 오이카와가 고개를 숙여 우시지마와 정면으로 눈을 맞췄다. 웃음소리를 멈춘 오이카와의 눈꼬리가 가늘게 휘었다.
“잘 가."
그 말을 들은 것을 끝으로 우시지마는 온전히 정신을 잃었다.
남자들이 우시지마 와카토시를 낙타에 싣고 출발했다. 그 먼 길을 다시 돌아가려면 서둘러야겠지. 남자들이 완전히 사라지자 주머니를 품에 껴안고 등을 돌린 오이카와의 표정에서 순식간에 미소가 사라졌다. 터덜터덜, 어두운 낯빛으로 두 사람이 들어왔던 골목 밖으로 혼자 돌아나갔다.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그가 중얼거렸다.
“빛이 나기는커녕...설마 내가 태양을 쳐다보다 눈이 멀 줄은 몰랐지."
-잘했어. 이제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온 거야. 우시지마는 집에 돌아가서 부모님께 조금 혼나겠지만, 그걸로 이 일은 묻혀 지겠지. 성인식을 치루기 전에 예쁜 여자랑 미뤄두었던 혼례를 치루고 아이도 가질 거야. 그리고 몇 년 뒤, 병약한 그의 이복형이 세상을 뜨면 정식으로 재산을 받아 엄청난 부자가 되겠지. 그땐 그 누구도, 왕조차도 그의 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할 거야. 그리고 너는...
오이카와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의 기억에서 잊혀지고 말겠지.
“바라던 바야."
-거짓말.
“거짓말이라도 상관없어. 두 번 다시 그를 볼 일은 없을 테니깐. 그리고 너도,"
오이카와가 그의 좌측을 째려봤다. 아무도 없는, 텅 빈 골목길일 터인데 그곳에는 여섯 살의 어린 오이카와가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으며 저를 올려다보았다. 오이카와는 항상 그 미소가 소름끼친다고 생각해왔지만 지금은 그저 혐오스럽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때 그 창고에서 죽을 뻔 했을 때부터 보이기 시작한 가식과 가증으로 포장된 유년기의 환영. 어쩌면 살기위한 의지를 가지게 하기 위해, 어쩌면 그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자기 자신이 만들어낸 도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와서 그런 것은 아무상관 없었다.
“사라져."
-후회할걸? 앞으로 넌 평생 외톨이로 살아갈 거야. 널 사랑해준 마지막 사람마저 네 손으로 없앴으니깐. 네 곁엔 아무도 남지 않게 되는 거야.
“닥쳐. 입 다물어.”
-너는 완전히, 혼자 남게 되어버릴 텐데도? 불쌍하고 멍청한 오이카와 토오루.
“꺼져!"
오이카와의 감정이 폭발하며 여태까지 내본 적 없는 큰 소리를 질렀다. 깊은 숨을 몰아쉬다 퍼뜩 정신이 들어 좌우를 살펴봤다. 한 순간도 그의 곁에서 떨어진 적이 없던 환영이 거짓말처럼 사라져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이.
“하...하하하....아하하하하...."
재밌는 것이라도 본 것 마냥 오이카와가 배를 잡고 한바탕 웃었다. 십년 넘게 자신을 괴롭혀온 존재가 이렇게 간단히 사라질 줄은 몰랐다. 그의 웃음은 기분 좋은 소리라기 보단 실성한 사람 같았다. 한참을 그렇게 미친 사람처럼 웃어대자 배가 당겨왔다. 역한 느낌에 토기가 치밀어 올랐다. 속은 쓰려왔고 명치를 세게 얻어맞은 듯한 느낌에 숨 쉬는 것이 힘들어졌다. 숨을 고르며 오이카와가 중얼거렸다.
“이제 정말......혼자가 되었네."
10.
찬란한 조각들
텅 빈 숙소가 너무 넓게 느껴졌다. 곳곳에 남아있는 우시지마의 흔적은 그가 감당하기에 너무 벅찼다. 접혀있는 옷이, 남아있는 체향이 당장이라도 그가 돌아올 것만 같은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려나. 오이카와는 결국 우시지마의 물건에는 손을 대지 못했다. 금화와 미처 돈으로 바꾸지 못한 재물들, 제 옷, 그리고 돈이 될 만한 것들만 추려서 도망치듯 그 곳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는 긴 여정에 필요할 것들을 사 모았다. 그날 저녁, 오이카와 토오루는 한 무리의 사람들과 그 도시를 나섰다. 그리고는 영영 그곳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앞으로도, 그 곳에 갈 일은 없을 것이다.
길고 힘든 여정 끝에 오이카와가 도착한 곳은 그가 그토록 바라고 그리던 바다였다. 난생 처음 보는 바다는, 그가 그리던 모습과 비슷했다. 넘실대는 파란 물결도, 탁 트인 수평선도 아름다웠다. 아름다웠지만, 딱 그 뿐이었다. 일생일대의 소원을 이뤘는데도 별로 감흥이 없었다.
구름 사이를 뚫고 쨍한 햇볕이 내렸다. 강렬한 빛이 물결 위로 흩뿌려졌다. 물결위로 부서진 찬란한 조각들이 그의 눈을 찔렀다. 정말로 천 개의 태양이 뜬 것 같았다. 오이카와는 그 모습을 하염없이 지켜보았다. 이내 그는 등을 돌렸다. 내가 원했던 건 이런 게 아닌데. 그가 작게 중얼대었다. 원래는 그토록 바라던 바닷가에 정착해서 살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곳도 저를 위한 곳은 아니었나보다. 오이카와는 쓸쓸하게 등을 돌렸다. 다음 날, 동이 트면 이곳을 떠날 것이다. 아무도 저를 모르는 곳으로 사라지듯. 홀연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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