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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그 백업] 암사슴은 죽음의 꿈을 꾸는가
매생이 전복죽
2024. 6. 15. 19:25
2021년 6월 5일에 마지막으로 편집
*스태그필드 스포일러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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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아 랜체스터는 종종 꿈을 꾸었다.
새카만 어둠 속에서 어둠보다 더 검은 암사슴이 서 있는 꿈을.
그 암사슴의 발치에는 피를 흘리며 쓰러진 수사슴이 있는 꿈을.
이윽고 암사슴이 죽어가는 수사슴을 질겅거리며 먹어 치우는 꿈을.
"그레이, 넌 이번에도 성적 잘 받았다며?"
"...어, 뭐."
옆에 앉은 콜린이 호들갑스럽게 굴었지만 그레이는 그런 사소한 소란조차도 달갑지 않았다. 대학을 위해서 공부는 잘 해야 했지만 그걸로 주목받는 것은 사양이었다.
"너라면 아무 대학이나 갈 수 있겠다. 어디로 갈 거야? 역시 옥스퍼드?"
"...글쎄. 아직 고민 중이야."
"하긴, 케임브릿지도 나쁘지 않지. 그리고..."
"나 먼저 가볼게."
시끄럽게 구는 그를 뒤로하고 그레이는 교실을 나섰다. 스태그필드 칼리지, 12학년 2학기. 이제 막 5월을 맞이하여 적당히 날은 풀렸다지만 영국의 변덕스러운 날씨는 도무지 예측할 수가 없었다. 품에 교과서를 한 아름 안은 그레이는 복도에 잠시 멈춰서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옥스퍼드는 무슨... 사라질 건데."
이 땅에서 사라지는 것. 그것이 졸업 후 그레이의 유일한 계획이었다. 재산을 상속받는 즉시 어머니와 함께 아무도 자신을 모르는 땅으로 가서 그레이 랜체스터가 아닌 엘리아 랜체스터로 사는 것. 그의 유일한 지망대학은 아이비리그였다. 어느 학교인진 중요하지 않았다. 사실 아이비리그가 아니어도 된다. 미국에 있다는 것. 오로지 그것만이 중요했다.
"무슨 생각 해?"
스산한 음성이 들렸지만 그레이는 그쪽으로 고개를 돌릴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첫 번째 이유는 꼴도 보기 싫어서였고, 두 번째 이유는 굳이 보지 않아도 이곳에 있는 사람은 그와 저, 오로지 둘 뿐이었기 때문이다.
"무시하는 거야?"
그레이는 계속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것은 제가 떠올렸던 기억 속의 푸르른 하늘이 아니었다. 그저 캄캄한 어둠. 오로지 그뿐.
"...말 시키지 마."
이윽고 돌아온 대답은 냉랭하기 짝이 없었다. 당연하게도 그레이는 그것에 대해 일말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다. 동시에 에드워드 역시 그 말투에 상처받지 않을 거란 것도 알고 있었다.
'차라리 날카롭게 찌르기라도 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는 그 무엇으로도 흠집 낼 수 없는 가죽 같았다. 그레이는 그의 유일한 약점이 자신임을 알았다. 그걸 알았기 때문에 그의 눈앞에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자기 자신을 죽이려 들었다. 하지만 이제는 죽을 수 없는 몸이 되었다. 그러니 에드워드 폭스를, 아니, 이 괴물에게 타격을 입힐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이 사실은 무엇보다도 그레이를 절망케 했다. 에드워드는 그레이가 얼마나 모진 말을 해도 상처 입는 척은 할지언정, 상처를 입지 않았다. 어떤 태도를 보여도 그레이를 제 옆에 묶어뒀으니 오만하게도 만족했다.
"왜, 또 인간이었던 때를 떠올리고 있었어? 그런 하찮은 것은 잊어버려."
에드워드가 히죽거렸다. 그레이는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택한 에드워드에 대한 복수는 두 가지. 하나는 제 본명은 그레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은 것이오, 다른 하나는 그에게 증오는커녕, 그 어떤 감정을 품지 않기로 한 것이다. 무관심. 회색빛이 도는 푸른 눈동자는 그 안에 검은 머리의 사내를 담을 때도 마치 지나가는 돌멩이라도 보듯 무심했다. 이 복수가 그에게 큰 타격을 미치지 못할 것도 알고 있었으나 그의 뜻대로 놀아나는 것보단 이편이 훨씬 나았다.
"...졸업하면 이 땅을 떠나려고 했어."
한동안 추억에 잠겨있었던 탓일까. 평소와는 다르게 그레이가 순순히 입을 열었다.
"아이비리그에 가려고?"
'오, 가엾은 그레이.' 에드워드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겹쳐서 들리는 것 같았다. '이룰 수 없는 꿈 이야기를 하는구나.'
"어디든. 미국으로 가서 새로운 신분으로 새로운 삶을 살려고. 아무도 날 기억 못 하는 곳에서 제대로 살려고 했어."
"여기도 그렇게 다르진 않은데."
맞다. 새로운 신분. 새로운 삶. 아무도 자신을 기억 못하는 곳. 그런 점에선 그레이가 꿈꾸던 미래와는 그리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단언컨대, 죽음까지 시도했을 정도로 이것은 절대로 제가 원하던 삶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의지는 어디에도 개입되지 않았다. 전부 이 남자의, 이 괴물의 손에 놀아났으니.
"넌 정말 개자식이야, 에드워드 폭스."
그레이가 모습을 바꿨다. 그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다. 몸에는 늪의 냄새가 나는 에드워드의 피가 흘렀으며, 심장이라는 기관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게 천천히 변이한 그레이는 암사슴을 닮은 괴물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머리에는 에드워드의 것만큼 크진 않았으나 작은 뿔이 돋아나 있었고, 그레이는 그것을 종종 근처의 바위에 갈곤 했다. 할 수만 있다면 없애버리고 싶었으나 그보다는 뾰족하게 만들어 에드워드를 찌르기 위함이었다. 종종 그 뿔은 에드워드의 배를 꿰뚫곤 했다. 하지만 그레이가 그를 찌른 것이 아니었다. 에드워드가 그레이에게 찔려준 것이다. 그레이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것이 묘하게 짜증이 났지만 당장은 눈앞의 상대에게 일말의 고통이라도 안겨준 점이 마음에 들었다. 가끔은 그대로 교미를 했다. 피가 철철 흐르는 짐승과 짐승의, 가장 원시적이고 야만적인 행위를. 그것은 인간들이 말하는 '사랑을 나누는' 것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그레이에게 있어서는 화풀이였고, 그를 비웃는 수단이었다. 에드워드가 저와의 행위에서 '그레이'라는 이름을 부를 때마다 얼마나 우습던지.
"넌 지독한 외로움에서 벗어나고 싶었다고 했지. 나도 그렇다고 했어, 기억해? 외로운 놈들끼리 만났다고."
그레이는 뒤틀린 발굽을 바닥에 쓸었다. 에드워드는 웃었다. 여전히 웃고 있었다. 무엇이 그리 재밌는지 그레이는 알 길이 없었다.
"그랬지."
"넌 수학을 배워야 해. 외로운 놈이 둘 있다고 두 세계가 하나로 이어지는 게 아니야. 영영 통합될 수 없는 외로운 세계가 둘이 됐어. 내가 있다고 네 외로움을 채워주지 못해."
'이 끔찍한 지옥에 네가 날 처박아뒀지.' 그레이는 그것을 사랑이 아니라고 단언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정의의 사랑과는 달랐다. 그렇다고 괴물의 사랑방식까지 그가 이해해줄 의무는 없었다.
"불쌍한 그레이 랜체스터. 난 외롭지 않아. 네가 있거든. 난 이 삶에 아주 만족해."
"...이 학교에 오는 게 아니었어. 억지를 부려서라도 이튼에, 미국으로라도 갈걸. 그날 밤에 밖으로 몰래 나가지 말 걸. 너와 마주치지 말 걸. 그랬더라면 지금 이 자리엔 내가 있지 않았을 텐데."
양심이라는 것이 아직 남아있는지 제가 말하고도 그 가시가 저를 찔러왔다. 이 삶이 진저리나게 싫으면서 다른 누군가가 그 자리를 저 대신 떠맡았으면 좋겠다니. 정말로 이기적이고 추악한 생각이었다. 그런 자신에게 혐오감을 느꼈지만, 지금이라도 누군가가 자신의 자리를 대신해준다면 자신은 당장 그에게 자리를 넘길 것이다. 그걸 알기 때문에 위선적인 부정조차 하지 못했다. 반면 에드워드는 탐탁지 않은 표정이었다.
"내가 널 보지 않았다면 다른 사람을 데려왔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내 사랑을 너무 과소평가하는데."
에드워드의 형태가 서서히 몸집을 불렸다. 뒤틀리고 높게 치솟은 뿔을 가진 기괴한 형태의 숫사슴. 애정을 담은 몸짓으로 그가 그레이의 목에 제 목을 비볐다.
"넌 이튼에 가지도 않았고, 미국에 가지도 않았지. 결국 스태그필드로 왔잖아. 이 모습을 봐,"
에드워드의 뿔이 부드럽게 그레이의 등을 쓸었다.
"완벽하지 않아?"
한 쌍의 사슴을 닮은 그림자가 바닥에 드리워졌다. 운명이라고 속삭이는 에드워드를 그레이는 가만 노려볼 뿐이었다. 이 세상에 없을 흉측한 그림자 두 개가 마치 서로를 위해 태어난 듯, 빌어먹을 정도로 잘 어울렸다. 그것이 자신만 아니었다면 저 또한 고개를 끄덕여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중 하나는 자신이었고, 그레이는 그 사실이 끔찍했다. 그 사실을 외면이라도 하듯 그는 곧장 인간의 형체로 돌아왔다. 낮은 웃음을 흘리며 에드워드 역시 돌아왔다. 그레이가 에드워드의 어깨를 떠밀자 에드워드는 떠밀려 '주었다'. 바닥에 누운 에드워드 위로 그레이가 올라탔다. 그가 휘파람을 불었다.
"적극적인데? 이런 일이라면 깔리는 것도 좋아."
"그 입 좀 다물어."
그레이가 대꾸하며 양손으로 그의 목을 감았다. 에드워드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그레이의 눈에는 증오도, 분노도 없었다. 그저 무덤덤했다. 파리를 잡는 인간처럼. 에드워드는 내내 여유로운 낯이었다. 그는 죽지 않는다. 딱히 이 정도론 고통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아마도 호흡하는 데 산소를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리라.
"그냥 이러기만 하면 재미없지."
에드워드가 부드럽게 그레이의 뒤통수로 손을 뻗었다. 아래로, 아래로 당겨와서는 저와 입을 맞췄다. 그레이는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그 몸짓에 따랐다. 그의 모든 신경은 에드워드의 목을 조르는 것에 쏠려있었다. 입을 맞추는 것 정도야 아무래도 좋았다. 호흡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영원히 입을 맞추는 것도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레이는 곧 목을 조르는 것에 질려갔고, 에드워드에게서 손을 놓으며 입술도 함께 거둬갔다.
"...난 네가 죽었으면 좋겠어."
"영광이야."
"하지만 정말로 널 죽일 수 있는 방법을 알아낸다면, 난 네 앞에서 날 죽일 거야."
에드워드는 그저 웃었다. 그런 방법이 있대도 그레이에게 알려주지 않을 것이 뻔했다. 어쨌든 무의미한 반항이었고 가정이었다. 그레이는 에드워드의 권속이었다. 그가 죽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사실상 없었다.
"그럼 넌 다시 혼자가 되겠지. 왜 나를 막지 못했나 자책하며 살아갈 테고."
그에게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는 것은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는 그런 것이 불가능한 존재라는 것은 이미 한참 전부터 알고 있었다.
"너를 그런 고독과 외로움 속에서 평생 썩어가게 하고 싶어. 그건 여태까지 네가 겪어온 그 어떤 고독보다도 괴로울 거야."
'너한테 영원토록 증오를 받아도 좋아, 네가 그만큼 나를 생각한다면.'
괴물의 절절한 증오인지, 사랑인지 모를 감정의 고백 속에서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그때는 자신이 느끼는 감정과 동일하다 칭했다. 그 정도로 그를 증오했으니까. 지금 이것은 제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발버둥. 거미줄에 칭칭 감긴 벌레의 반항.
"난 이제 널 증오하지 않아, 에드워드 폭스. 네겐 아무 감정도 느끼지 않아."
에드워드는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까. 그레이는 굳이 그를 돌아보지 않았다. 또 예의 히죽거리는 얼굴을 하고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 게 뻔했다.
"난 오로지 죽음만을 갈망할 거야. 그리고 그게 내 머릿속을 채우는 유일한 짝사랑이 될 거야. 그러니까 내 생각 속에 네가 들어올 공간은 조금도 없어."
물론 그레이는 에드워드가 이 말로 인해 일말의 타격도 입지 않을 거라 예상했다. 벼룩이 코끼리를 치는 꼴이다. 그걸 알면서도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순응하지 않겠다는 긍지이자 아집이었다. 꼭 아직도 제가 인간인 마냥. 이 진창 속에서 고고히 서겠다는 마냥.
"우린 영원히 외롭고 고독할 거야. 넌 바보같이 그것도 모르겠지."
그레이는 당장 곁에만 있다면 괜찮다는 듯이 굴던 에드워드의 모습을 떠올렸다. 이것은 끝없는 나락일 뿐인데. 영원히 고독하던 괴물은 저와 닮은 피조물을 곁에 두자 이성을 잃어버린 게 분명했다. 어쩌면 그는 둘의 눈이 영영 맞닿지 않더라도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 만족할지도 몰랐다. 그레이는 달랐다. 영원이란 저주였다. 운명에 반항하는 인간은, 인간이었던 존재는, 지독히도 외로웠다.
그레이는 아무 곳에나 누워 눈을 감았다. 이루어질 수 없는 짝사랑은 그 무엇보다 애달팠다. 하루살이는 내일을 꿈꾸고 인간은 영생을 꿈꿨다. 그리고 암사슴은 죽음의 꿈을 꾸었다. 종종 그 꿈에 수사슴을 죽여서 씹어먹는 내용이 섞여 있다는 사실은 자신의 본명과 함께 영원토록 함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