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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그백업] Maybe,

매생이 전복죽 2024. 6. 15. 19:22

2020년 3월 31일에 마지막으로 편집

    
 
 
 
 
 
you’re gonna be the one that saves me.
<Wonderwall-Oasis>
    
 
 
 
 
헝거게임이 끝나고, 혁명에 뛰어들었다. 살아남는 것을, 사랑받는 것을, 승리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왔다. 그리고 제이든 필레인은 그 모든 것을 보란 듯이 이뤄냈다. 100회 헝거게임의 우승자, 판엠의 사랑, 판엠의 영웅. 그렇지만 이제 그는 뛰지 않아도 되었다. 살기 위해서 누군가를 죽이지 않아도 되었고, 사랑받기 위해 관심을 끌 필요도 없었으며, 승리를 위해 타인에게 칼을 겨누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자 조금 쉬고 싶어졌다. 이제 무엇을 하면 좋을지 생각을 정리해야 했고, 도망치듯 떠나온 구역도 그리웠으며, 소란 속에서 멀어지고 싶었다.
    
 
 
자신에게 그런 핑계를 대며, 에밀리오를 2구역에 데려가겠다고 했다. 표면상으로는 감시의 목적이었지만, 그들 사이에 그런 것은 필요 없었다. 평화유지군은 끔찍하게 싫었지만, 그 안에 속한 개인은 미워해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그들의 패배로 끝난 지금, 과거의 조직 따위 아무래도 좋았다. 그저 예전처럼 그가 다시 푸른 하늘을 보고, 숨을 쉬고, 웃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었다. 그걸로 만족한다고 생각했다.
    
 
 
에밀리오가 처음 쉘비의 집으로 향했을 때, 제이든은 한참 떨어진 곳에서 웃음을 지으며 잘 다녀오라고 손을 흔들었다. 그가 나오기 전까지의 시간은 짜증스러울 정도로 길었으며, 또 초조해졌다. 결혼. 결혼한다고 했었지. 분명 이건, 그래. 서운한 감정일 것이다. 에밀은 어렸을 때부터 같이 자란 사이였으니 그가 훌쩍 커버려 새삼 결혼을 할 나이에 이르렀다는 게, 또 자신이 이 사실을 내내 모르고 있었다는 것에 대해. 에밀리오가 빈손으로 터덜터덜 걸어 나와 아무도 없다고 말해주었을 때가 되어서야 안도의 한숨을 몰래 내쉬었다. 그것을 뒤늦게 깨달은 제이든은 에밀리오를 안아주며 그의 등 뒤에서 인상을 썼다. 그냥 지금은 이대로 둘만 있고 싶어서 그랬을 것이다.
    
 
 
제이든은 눈치가 빨랐다. 하지만 그도 인간이었고, 사각지대란 존재하기 마련이었다.
    
 
 
“나 왔어, 에밀.”
    
 
 
“형,”
    
 
 
“기다렸어?”
    
 
 
늦은 밤이면 멀쩡하게 남아있는 제 집을 놔두고 에밀리오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러면 에밀리오는 그를 맞아주었고, 둘은 같은 침대에 들었다. 황량한 세상에 단둘이 남겨진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느낌이 어쩐지 모르게 좋았다. 제 옆에 붙어있는 온기도, 규칙적인 숨소리도, 손가락이 헤집는 부드러운 머리카락의 감촉도, 자신이 귀에 남긴 반짝이는 붉은빛 흔적도.
    
 
 
“....에밀,”
    
 
 
그리고 이따금씩 낮고 다정한 목소리로 잠든 에밀리오를 불러보았다. 그렇게 불러보면 아무 반응없이 새근새근 잘 때도, 대답하려는 듯이 입술을 달싹이는 것도 이렇게나 귀여운데 너는 모르지. 검지를 든 제이든은 에밀리오의 코끝을 살짝 건드렸다. 어쩐지 작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
.
.
 
 
 
 
세면대 앞에 선 제이든은 머리를 정리하며 머리를 넘겼다가, 내렸다가, 다시 쓸어 올렸다가를 반복했다. 어차피 만날 상대는 에밀리오 뿐이었는데 평소보다 몇 배의 시간을 들이며 공을 들였다. 그렇게 하면서도 왜 그러고 있는지는 몰랐다. 그러다가 불현듯 에밀리오의 생각이 떠올랐다. 드리운 속눈썹이 예뻤는데. 그 위에 입을 맞추면 잘게 떨리다가 보랏빛 눈동자와 마주치지 않을까. 어떤 눈으로 저를 바라볼까. 놀란 표정일까, 경멸하는 표정일까, 어쩌면 얼굴을 조금 붉힐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그 입으로 형이라고 부르면서 안겨 온다면...
    
 
 
쿵.
    
 
 
“어떻게 동생 같은 애한테... 미쳤어?”
    
 
 
제이든은 거울에 제 이마를 박았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한거지.
    
 
 
“상대는 에밀이야!”
    
 
 
중얼거리듯 말하며 얼빠진 얼굴로 거울을 들여다본 제이든은 그곳에서 멍청한 얼굴로 마주보고 있는 자신의 눈을 마주했다.
    
 
 
“에밀리오 퀸튼이라고. 정신 차려, 제이든.”
    
 
 
얼굴에 아무리 찬물을 끼얹어도, 다시 자기 자신에게 정신을 차리라고 말을 해봐도, 그가 이 감각을 모를 리가 없었다. 오히려 왜 여태까지 몰랐는지 헛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제이든은 이 감정과 처음 대면한 것은 아니었으나 피해 가는 방법은 알지 못했다. 항상 누군가에게 마음을 품게 되면 상대의 마음을 얻는 것 따윈 간단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도 그리 어렵지 않았다. 달콤한 말을 속삭이고, 적당히 들이댔다가 빠지고, 은근슬쩍 손을 잡고. 하지만 한 번이라도 가족처럼 여기던 사람을 좋아해 본 적은 없었다. 자신이 작업을 걸듯이 굴었다가 뭐 하는 거냐며 웃어버릴 에밀리오의 얼굴이 생각나서 제이든은 기껏 공들여 쓸어올린 제 머리를 크게 헤집었다.
    
 
 
“내가 미쳤지...”
    
 
 
제이든은 결국 그렇게 자기 자신과 실랑이를 벌이다가 평소보다 늦게 에밀리오의 집으로 향했다. 가는 내내 그 한마디가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내가 미쳤지, 내가 미쳤지, 내가 미쳤지...
    
 
 
  
.
.
.
 
    
 
 
"에밀. 뭐 하나 물어봐도 돼?"
    
 
 
"뭔데?"
    
 
 
"왜 내게 귀를 뚫어달라고 했어?"
    
 
 
"...... 그냥. 형 말고 부탁할 사람도 없었고.“
    
 
 
그냥. 형 말곤 부탁할 사람도 없었다. 그 말을 듣고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결국 에밀리오는 자신을 그저 친형제처럼 대하고 있는 것 뿐이었다. 댈러스의 묘비에 가보겠다는 말엔 다시금 발끝부터 가라앉는 기분이 들었다. 에밀리오는 댈러스의 죽음에 대해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말해줬지만, 그와 닮은 에밀리오의 얼굴을 볼 때마다 꼭 댈러스의 생각이 함께 떠올라 쉬이 가만히 있질 못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였더라, 에밀리오의 얼굴을 보고 댈러스을 함께 떠올리지 않은 지가. 게다가 그의 쌍둥이에게 이런 감정을 품고 있다니. 댈러스가 있었다면 분명 괜찮다고 해줬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은 역시 댈러스를 두고 홀로 돌아왔다. 에밀리오도 그걸 알았고. 그런 상대를 미워하지 않을 순 있었지만,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는 것은... 속이 답답했다. 에밀리오가 쉘비의 집에 다녀오던 것과는 다른 종류의 답답함이었다.
    
 
 
“벌 받는건가...”
    
 
 
제이든은 씁쓸하게 웃으며 온기가 식어버린 침대를 정리했다. 역시 한 번도 연애에 실패해 본적 없는 자신이었지만, 이 마음만큼은 접어둬야 할 것 같았다. 몇 번이고 이불을 펴던 손은 어느샌가 에밀리오가 눕던 자리 위에 멈춰있었다. 목구멍에 숨이 턱하고 막히는 것 같았다.
 
 
  
 
.
.
.
    
 
 
 
"- 그래서, 이제 갈 거야."
    
 
 
그때부터 사고가 멈췄다. 꼭 머릿속은 백짓장인데 그 안에 말을 흘려내는 느낌이었다. 그 이후로는 무슨 말을 하는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단 한가지 생각만이 소리를 질렀다. 가지마. 떠나지 마. 하지만 저 역시 그를 놓겠다고 다짐하지 않았던가. 어쩌면 이게 기회일지도 몰랐다. 이렇게 다시 친했던 형동생 사이로 돌아가는거다.
    
 
 
“그게 무슨 소리야...”
    
 
 
평소에는 그렇게 유려하게 말을 흘려내던 그였는데, 정말 아무말도 나오지 않는 입술을 몇 번이나 달싹였다. 목소리가 좀체 나오지 않았다. 간신히 끌어낸 소리마저 어색하게 들렸다. 마지막 인사를 멍한 표정으로 받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어젯밤에 더 많은 이야기를 할 걸. 이럴 줄 알았으면... 마지막은 좀 더 멋진 모습으로 남고 싶었는데. 소용돌이치는 생각 속에 빠져있던 차에, 에밀리오가 제 멱살을 잡았다. 얼빠진 눈을 끔뻑이던 제이든은 에밀리오가 한 말에 호흡이 멈췄다.
    
 
 
"사랑해."
    
 
 
사랑이라고? 제가 제대로 들은 것이 맞는지 의심할 틈도 주지 않은 채로 에밀리오가 등을 돌렸다. 머릿속이 시끄러웠다. 제대로 생각하지도 못한채 제이든의 입에서 말이 튀어나왔다.
    
 
 
“잠깐만.”
    
 
 
뭔가 굉장한 말을 할 타이밍이었지만, 사고를 거치지 않고 터져나오려는 날 것의 말들을 막느라 더 바빴다. 무슨 말부터 해야할까. 다행히 에밀리오는 그 자리에 멈춰주었다.
    
 
 
“...그럼 왜 떠나려고 하는거야.”
    
 
 
젠장. 입밖으로 무작정 튀어나온 말에 제 머리를 헤집어 놓았다. 이게 아닌데. 이렇게 말하려던 게 아닌데. 그의 눈에 그 자리에 굳어버리는 에밀리오가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다. 손을 잡고, 몇 번이고 입맞춤을 남기고 싶었다. 하지만 제자리에서 멋대가리 없는 말을 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에밀,”
    
 
 
결국 제이든은 걸음을 떼어 에밀리오의 바로 뒤까지 갈 수 있었다. 에밀리오의 손을 단단하게 잡고, 자신을 볼 수 있도록 다른 손으로 그의 어깨를 돌렸다. 자신을 놀란 듯이 바라보는 눈을 마주했다. 제이든은 확신할 수 있었다. 이건 자신만의 감정이 아니었다. 어쩌면 그 붉디 붉은 핏빛 길을 걸어 여기까지 오게 된 까닭은 이 보라색 눈동자를 마주하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내가 여기 있잖아.”
    
 
 
붙잡은 손을 들어올려 손등에 입술을 꾹 눌렀다. 분명 한두번 해본 것도 아닌데, 이 모든 것이 서툴게 느껴졌다. 심장이 쿵쿵 뛰었고 호흡이 계속 흐트러졌다. 제발. 눈에는 간절함을 담아 에밀리오와 눈을 맞춘다. 이건 그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에밀리오에게 그간의 연애지식을 끌어모아 쓰는, 필사적인 행동이었다. 제발 넘어와주길. 제발 자신을 포기하지 않길.
    
 
 
“가지마, 에밀.”
 
 
    
제발 떠나지말고 여기 있어줘. 앞만 보고 달리는 것을 멈춘 내 곁에 머물러줘. 내 호흡이 되어줘.
    
 
 
“나는... 네가 지금 이렇게 가면...”
 
 
 
 
 
 
 
 
 
 
 
 
 
 
 
 
 
 
 
 
 
 
 
 
 
 
 
 
 
 
 
 
 
 
 
 
 
 
 
 
 
 
 
 
 
 
 
 
 
 
 
 
 
 
 
 
 
 
 
 
 
 
 
 
 
 
 
 
 
 
 
 
 
 
 
 
 
 
 
 
 
 
 
 
 
 
 
 
 
 
 
 
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도망감)